ADVERTISEMENT

"외교관들, 정치인 수행하지 말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0면

국회의원을 비롯한 고위급 인사들이 해외 방문 시 재외공관에 도가 넘는 수행을 요구하는 ‘비정상적 관행’에 대해 박근혜(얼굴) 대통령이 일침을 가했다. 외교관들이 외유성 출장을 오는 정치인들의 ‘관광가이드’ 역할을 하느라 업무 수행에 지장을 받는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 1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재외공관장 격려 만찬에서 “재외공관이 본연의 임무에서 벗어나 국내에서 오는 정치인들이나 유력 인사들의 편의 제공과 일정 수행 등에 열중하는 비정상적인 업무 행태는 이제 있어서는 안 된다”며 “국익을 위한 외교전을 펼치고 재외 국민과 동포들의 삶을 보살피는 데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라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어 박 대통령은 “그런 일은 ‘비정상의 정상화’ 차원에서 반드시 바로잡고 본연의 업무에 충실해 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본지 3월 17일자 8면.

 박 대통령은 또 “재외공관의 주인은 바로 국민이고 국민이 편하게 이용할 수 없는 공관은 없는 공관이나 마찬가지”라며 “해외 출국자가 매해 증가해 지난해 1500만 명을 기록했는데, 우리 국민이 세계 어디에 있든 안심하고 지낼 수 있도록 재외공관이 든든한 보호자가 돼 줘야 한다”고 말했다. 재외 동포 지원, 일자리 창출과 해외투자 유치를 위한 경제외교 역량 극대화도 주문했다.

 이날 대통령의 발언은 공관장과 정치권 모두를 향한 것이었다. 공관장이 눈치를 보며 영향력 있는 국내 인사들 접대에 주력하는 일도, 정치인들이 해외 출장 중 부적절하게 공관 인력 지원을 요구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의원외교 명목으로 정치인들이 해외를 찾을 때 재외공관 외교관들이 쇼핑을 위한 안내나 개인적인 일 처리를 위한 통역 등에 동원되는 일이 많다.

동남아지역의 재외공관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한 서기관은 “해외 관광객이 많이 오는 좋은 계절에 맞춰 의원 방문단도 찾아오는 경우가 많아 일이 몰리곤 한다”며 “이럴 때 수행을 맡다 보면 재외국민 보호 등 다른 업무를 병행하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만찬에 참석한 공관장들은 박 대통령의 예상치 못한 발언에 적잖이 놀랐다고 한다. 한 참석자는 “통일외교가 강조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방점이 찍힌 것은 국내에서 오는 인사들 심부름하는 데 신경 쓰지 말고 원래 업무를 충실히 하라는 지적이었다”며 “강도가 아주 셌다”고 말했다. 또 “특히 그냥 ‘국내에서 오는 이들’이 아니라 정치인, 유력 인사라고 콕 짚는 것을 들으면서 직책 있는 이들이 자꾸 해외에 나가 공관 업무에 지장을 주는 관행을 막으려는 의지가 확고하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참석자도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이 정치인 수발 들지 말라는 얘기인데, 경고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외교부 관계자는 “재외공관이 창조경제의 시너지 효과 강화를 위한 해외 교두보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게 정부의 명확한 입장”이라며 “ 불필요한 일에 공관 자원을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당부이자 경고였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유지혜·정원엽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