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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의 칭기즈칸 꿈 … 설계자는 이 남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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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블라디미르 푸틴

소련이 해체되던 1991년, 러시아 연방 대통령 보리스 옐친은 서구 민주제를 택했다. 하지만 옐친도 자인했듯 러시아적 특색과 사상이 결여된 ‘영혼 없는 민주화의 길’이었다. 그해 알렉산드르 두긴이란 29세의 무명 언론인이 반기를 들었다. 논문을 통해 “공동체를 우선하는 로마의 후예(육상세력) 러시아는 카르타고의 후예(해상세력)인 미국의 개인·물질주의와 대결할 수밖에 없다”며 “악(미국)을 무찌르려면 러시아에서 보수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20여 년 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를 강력한 전체주의 국가로 만들었다. 밖으로는 미국 등 서방의 경고에 아랑곳없이 크림반도를 합병했고 안으로는 반(反)동성애법을 제정하는 등 ‘러시아의 길’을 걷고 있다. 이런 푸틴의 거침없는 행보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는 이론가가 두긴이라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알렉산드르 두긴

 모스크바 태생의 두긴은 소련 해체 후 본격적으로 정치투쟁에 나섰다. 92년 민족볼셰비키당(NBP)을 창설해 애국·보수주의를 통한 강한 러시아를 설파했다. 명망 있는 이론가들을 자신의 운동에 끌어들였고 웹사이트·신문·잡지를 운영하며 영향력을 키웠다. 90년대 말엔 러시아 극우세력의 정신적 지도자로 자리매김했다.

 두긴은 99년 두 차례 국가두마(하원) 의장을 지낸 보수 정치인 겐나디 셀레즈뇨프 의원의 고문으로 발탁돼 정계에 진출했다. 하원 국가안보자문회의 지정학 부문 책임자로 선임되기도 했다. 2002년엔 유라시아당을 창설했는데 군과 정교회 지도자들의 지지를 받았고 당원들이 푸틴 행정부에 진출했다.

2004년 우크라이나에서 친서방 세력이 ‘오렌지 혁명’으로 집권하자 두긴은 ‘러시아를 봉쇄하려는 서방의 획책’으로 규정했다. 곧바로 ‘유라시아 청년연합’을 창설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등 유럽에 반서구 사상 심기에 나섰다. 이후 우크라이나에선 기피인물로 지정돼 추방됐다.

 푸틴이 권위주의·팽창주의 정책을 본격화한 2000년대 말부터 두긴의 대중적 활동은 더 활발해졌다. 2008년 국립 모스크바대 교수로 임명된 그는 유력 TV채널에 수시로 출연해 국내 민주화 시위, 푸틴의 유라시아연합 구상 등에 대한 우파의 논리를 설파했다. 국제관계 전문가인 앤턴 바버신 등은 “크렘린이 방송을 통제하는 상황에서 그의 두드러진 공개 활동은 푸틴과의 관계를 말해주는 사인”이라며 “두긴이 이를 통해 개인 자유 제한, 가족 중시 전통, 정교회 권위 회복 등 푸틴의 입장을 대중화하고 있다”고 포린어페어스에서 분석했다.

두긴은 또 대통령 경제자문인 세르게이 글라제프를 통해 푸틴에게 영향을 끼친다고 알려져 있다.

 두긴의 사상은 신유라시아주의로 불린다. 유라시아주의는 1917년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을 피해 유럽으로 망명한 이들로부터 창시됐다. 이들은 러시아가 유럽도 아시아도 아닌 유라시아의 중심에서 또 다른 세력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제·개방경제 등은 지정학상 러시아를 위험에 빠뜨리며 강력한 중앙집권을 구축해야 한다고 했다. 유럽화를 추구한 표트르 대제를 매국노로 규정한 반면 칭기즈칸의 중앙집권제를 이 땅에 이식한 몽골 타타르를 높이 평가한다. 이들은 유라시아 제국을 건설해 미국의 패권을 와해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긴은 동으로는 만주와 신장·티베트, 서로는 옛 소련 국가들과 동구권을 통합한 후 EU 국가들까지 러시아의 보호 아래 두는 ‘러시아의 봄’을 주창하고 있다.

이충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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