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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추적] 산피아의 밥그릇, 인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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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제품 하나 출시하려면 5~6개의 인증 마크를 받아야 합니다. 자금과 인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에는 너무 버거운 일입니다.”

 냉동·제습기 생산업체인 이지철 현대기술산업 대표가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한 말이다. 이 대표는 지난달 20일 대통령 주재 민관 합동 규제개혁 점검회의에 참석해 “중복 인증 규제를 확 풀어 달라”고 요청해 주목을 받았던 인물이다. 이 대표에 따르면 기업들은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Q마크·고효율기자재·신제품(NEP)·신기술(NET)·ISO(국제표준화기구)와 같은 비슷비슷한 인증을 되도록 많이 받으려고 경쟁한다. 인증 마크가 많을수록 관공서 입찰에서 점수를 높게 받아서다. 관공서 납품에 성공해야 일반 소매시장이 쉽게 뚫리기 때문에 마케팅 역량이 부족한 중소기업들은 인증에 사활을 건다.

 하지만 출혈이 너무 크다. 제품 모델 하나당 들어가는 인증 비용은 검사비·수수료를 포함해 평균 2000만~3000만원 선이다. 1년에 20개의 모델을 내놓는다면 인증에만 연간 4억~6억원의 돈을 써야 한다는 얘기다. 인력이 적은 기업은 대행업체를 써야 하는 부담까지 있다.

 이런 비효율적인 인증제도의 중심에는 산피아(산업통상자원부 관료와 마피아의 합성어)가 있다.

<중앙일보 4월 2일자 1, 6면>

 국회 산업통상자원위 김한표(새누리당) 의원에 따르면 산업부 소관 인증기관 19곳(민간 10곳, 공공 9곳)의 기관장이나 부기관장은 대부분 산업부 퇴직 고위 관료(4급 이상)들이다. 이들 기관이 맡고 있는 인증제도는 모두 30개로 국내 전체 인증제도(136개)의 22%다. 인증 5개 중 1개를 책임지고 있는 셈이다. 재계 인사는 “산업부 소관 기관들이 인증제도를 장악하고 있어 산업부 퇴직 공무원이 다른 부처보다 갈 자리가 많다”며 “인증이 곧 산피아의 권력”이라고 말했다. 복잡한 인증제도가 쉽게 개선되지 않는 이유다.

 기관별로 같은 업무를 맡고 있는 것도 문제다. 안전·보건·환경·품질을 비롯해 모든 산업 분야에서 폭넓게 쓰이는 KC(국가통합인증) 마크가 대표적이다. 산업부 소관 민간 인증기관 4곳(화학융합시험연구원·기계전기전자시험연구원·건설생활환경시험연구원·의류시험연구원)이 똑같이 이 마크에 대한 인증 업무를 하고 있다. 기관들은 “산업 분야가 다르다”고 항변하지만 기업들 입장에서는 시어머니가 여럿이라고 생각될 수밖에 없다.

 물론 정부가 인증제도 개선을 위해 그동안 노력을 안 한 것은 아니다. 지식경제부(현 산업부)는 2012년 같은 품목에 대해 중복 심사를 면제하는 내용의 인증제도 선진화 방안을 내놨다. 하지만 이 제도는 현장에서 별다른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중복심사를 면제했지만 인증기관은 모두 건재했다. 관공서 입찰 때 인증 마크 개수에 따라 가점을 주는 제도를 그대로 유지해서다. 기업들로서는 중복되는 줄 알면서도 여전히 인증 마크 경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인증제도는 산피아가 낙하산 인사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국가나 지자체로부터 사무위탁을 받은 민간 단체는 공무원 취업 심사 대상에서 제외된다’(공직자윤리법 시행령 33조)는 규정이 근거다. 민간단체지만 정부가 승인한 인증 업무를 하고 있기 때문에 특수성을 인정해 줘야 한다는 논리다. 이를 바탕으로 산업부 퇴직 고위 관료 다수는 ‘퇴직 전 5년간 소속 부서와 밀접한 업무 관련성이 있는 민간 기업에는 취업할 수 없다’ ‘퇴직 뒤 2년까지는 민간 기업에 취업할 수 없다’는 규정에 걸리지 않고 어렵지 않게 재취업 관문을 통과했다.

 산업부는 끝장토론 이후 윤상직 장관 지시로 136개 인증제도를 40여 개로 줄이는 작업에 착수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민간 인증기관 낙하산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나오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한성대 이창원(행정학) 교수는 “합법적이라는 이유로 낙하산 인사가 내려가는 관행이 반복되면 인증 규제가 풀릴 수 없다”며 “이는 고스란히 국민이 부담해야 하는 사회적 비용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하루빨리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이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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