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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과 키친 사이 생존과 문화 사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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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8호 08면

부엌이 퇴화한다. 주중에는 외식으로, 주말에는 배달 음식으로 위장을 채우는 사람들 사이에서 존재감은 점점 줄어든다. 남의 먹는 모습(먹방)에 대리만족을 느끼고, 혼자 때우는 끼니(혼밥)가 서글프면서도 정작 부엌으로 가지 않는다. 바빠서, 귀찮아서, 힘들어서 부엌을 소외시킨다.

새로운 부엌 이야기 … 서울리빙디자인페어·금호미술관 ‘20세기 부엌과 디자인’전

이런 세태를 간파한 것일까. 최근 부엌을 테마로 삼은 전시가 잇따라 열렸다. 하나는 ‘2014 서울리빙디자인페어’(3월 26~30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 마련된 ‘디자이너스 초이스’다. 각 분야에서 활동하는 8팀의 아티스트들이 제각기 해석한 부엌과 다이닝 공간을 선보였다. 서울 삼청로 금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키친-20세기 부엌과 디자인’전(3월 20일~6월 29일)도 흥미롭다. 부엌의 형태가 생겨난 1920년부터 지금까지 부엌의 한 세기 역사를 조망한다. 너무나 익숙한 부엌의 재발견. 우리의 일상을 돌아볼 기회이기도 하다.


‘디자이너스 초이스’에 참여한 주요 아티스트들이 각자의 전시 공간에서 포즈를 취했다. 왼쪽부터 서영희 스타일리스트, 장광효 패션 디자이너, 최임식 공간 디자이너, 이상화(왼쪽)·안지용 건축그룹 메타포 대표.

<2014 서울리빙디자인페어 ‘디자이너스 초이스’>
‘디자이너스 초이스’가 마련된 코엑스 전시장. 팀마다 가로 6m, 세로 4.5m 면적의 작은 공간에 새로운 부엌 공간을 꾸몄다. 본업이 제각각인 작가들인 만큼 다채로운 광경이 펼쳐졌다. 행사를 주최한 디자인하우스 측은 “안방·거실을 지나 이제는 부엌이 가정의 중심이 돼야 하는 취지에서 주제를 잡았다”면서 “요리만이 아닌 작업실·사무실로 대체되는 부엌도 생각해 볼 때”라는 말로 전시의 의미를 부여했다.

하루를 여는 아침 부엌의 소리
스타일리스트 서영희씨의 부스는 ‘엄마와 아침’이란 타이틀을 달았다. 유년 시절의 추억이 모티브가 됐다. 꼭두새벽부터 아침 준비를 하는 엄마를 따라 들어간 부엌, 그는 따뜻한 부뚜막 위에 올라앉아 인형놀이나 소꿉놀이를 하곤 했다. 엄마의 칼질 소리, 전 부치는 소리는 하루를 열었다. 일상의 평온함을 말해주는 시그널이었다.
서씨는 그때를 되살려 부스 한가운데 부뚜막 같은 사각의 오브제를 설치하고 그 내부로 다양한 부엌의 소리들을 담아 영상물을 틀었다. 천장에는 콩나물·두부·시금치를 본뜬 조명등을 만들기도 했다.
주제를 이렇게 구체화하기까지 영화 한 편이 큰 도움이 됐다. “‘고령화 가족’이란 작품이 참 인상적이었어요. 엄마가 문제 많은 자식들을 위해 매일 삼겹살을 굽고 된장찌개를 끓여내죠. 한가득 차려진 식탁에서 엄마의 힘이랄까, 그런 걸 느꼈죠.” 기교보다 소박함에 초점을 맞춘 서씨의 부스는 올 서울리빙디자인페어에서 ‘눈에 띄는 공간상’에 뽑히기도 했다.

새신랑의 부엌 세레나데
남성복 패션 디자이너 장광효씨는 ‘부엌=여자가 꾸미는 공간’이라는 선입견을 깼다. ‘신랑이 제안하는 신혼주방’을 컨셉트로 삼았다.
공간 한가운데엔 흰색의 거대한 테이블과 3m가 넘는 빈티지 장식장이 균형에 맞춰 배치돼 있다. 테이블이 큰 건 단순한 식탁이 아니라서다. 밥을 먹기 위한 용도만이 아닌 함께 일하고, 대화하고, 사랑을 나누는 매개체라는 의미다. 부부 공간의 중심이 부엌으로 바뀌는 시작점이기도 하다.
여기에 포인트로 둔 건 테이블 위 반가사유상. 한지를 세 번 덧입히고, 마치 팝아트처럼 물방울 무늬를 찍었다. 이번 시즌 그의 컬렉션에서 보여준 화려한 색채와 닮은 모습이었다. “웃고 있는 모습이 참 보기 좋지 않나요. 신랑이 평생 신부에게 저런 표정을 지어주라는 의미예요.”
주말 부부인 그는 평소 요리나 설거지를 하면서 “아무래도 남자 손이 좀 거칠어지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부엌에서의 외조가 더 행복한 가정을 만든다는 그가 남긴 한마디. “나이 들어 보니까 이게 순리예요. 순리.”

유년의 기억을 부르는 백자
공간 디자이너 최임식씨의 부스는 쉽게 해석되지 않는다. ‘식도구·식문화 디자인’이란 타이틀을 단 공간에는 검은 색의 사방 벽에 손바닥만한 백자 800여 점이 붙어 있다. 그 하나하나의 형태도 그릇이라기보다는 스피커를 닮은 나팔 모양이다. 과연 무슨 의미일까.
최씨는 주제를 받아들고 어느 때보다 고심했다고 했다. 새로운 부엌의 의미를 찾기에 앞서 주변을 살펴 봤고, 거기서 감을 잡았다. 라면과 햇반을 비상식량처럼 갖춰 놓는 것은 기본. 게다가 일회용 플라스틱 그릇을 남용하는 모습이 특히 눈에 들어왔다. “밥 한 끼 먹는다는 게 참 비관적으로 느껴졌어요. 그저 편한 것만 찾고, 대충 배만 채우는 된다는 식의 음식문화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죠.” 그러면서 어릴 적 한옥 부엌의 벽장에 쌓여 있던 그릇을 떠올렸다. 제기와 백자가 차곡차곡 쌓여 있는 한 장면이 머릿속에 박혔다. “거기서 오래 놀지 못하게 하던 어른들 말씀도 생각나고…. 그릇이 그냥 식기가 아니라 저와 가족의 추억이 담긴 매개체였죠.”
그는 잠깐이나마 전시가 잠재된 기억과 행복을 되살려주는 연결고리가 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거듭 강조했다.

좋은 소리로 채우는 안식처
음식만큼 건강을 좌우하는 것이 뭘까. 이상화·안지용 대표로 이뤄진 건축그룹 메니페스토의 구상은 여기에서 시작됐다. 부엌의 의미를 음식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건강으로 연결시켰다. 여기에 건축이라는 본업을 살렸다. “음식이 몸을 건강하게 한다면 공간이 주는 정신적 위안도 꽤 크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부엌 그 자체가 안식처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죠.” 이 대표의 설명이다.
둘은 정신적 위안을 줄 수 있는 매개체로 오디오를 떠올렸다. ‘사운드(Sound)’란 단어가 ‘건강한’ 과 ‘소리’라는 이중적 의미가 있다는 점도 아이디어가 됐다. 그래서 공간에는 식탁 대신 영국 브랜드 루아크 오디오를 놓았다.
이들은 특히 1인 가구에 초점을 맞췄다. 안 대표는 “싱글들에게는 뭘 먹을까가 오히려 스트레스일 수 있다”면서 “그들에게 요리가 재앙이 아닌 행복이 될 수 있는 부엌을 만들어 보려 했다”고 말했다.
벽에 거울을 붙인 것도 나름 이유가 있었다. 혼자 있어도 연속적으로 반사가 되니 마치 여럿으로 보인다는 것. “아, 근데 이걸 보면서 더 외로워지면 어쩌죠.” 두 사람이 멋쩍게 웃었다.

갤러리로, 다실로 변화한 부엌
이 밖에 오준식(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민송이·민들레(스타일리스트) , 박현주(아트 디렉터), 최홍규(쇳대박물관 관장)도 이번 ‘디자이너스 초이스’에 참여해 부엌을 변신시켰다.
오씨의 경우 부엌을 차 한 잔과 함께하는 명상의 자리로 해석했다. 타이틀은 ‘생각하는 사람의 방’. ‘다실(茶室)’이라는 의미에서 동양의 좌식 생활을 떠올렸고, 양반다리를 해도 불편하지 않게 움푹 파인 의자를 제작했다. ‘부처의 의자(Buddah’s Chair)’다.
민송이·민들레 듀오에게 부엌은 갤러리였다. 주방도구 자체를 전시품처럼 이리저리 활용해 접시를 액자처럼 벽에 붙이고, 컵과 주전자를 샹들리에처럼 갖다 붙인 아이디어가 돋보였다.
박현주씨는 부엌을 동심으로 바라봤다. 특히 어른들은 알 수 없는 식탁 아래에 주목, 상상의 놀이터를 펼쳐냈다. 채소와 과일로 동화 속 마을을 꾸며 편식 개선에 대한 메시지를 담았다. 최홍규씨는 식탁 위 음식이 전국 각지에서 생산됐다는 점에서 아이디어를 찾았다. 조선시대 후기부터 구한말까지 천연 양념과 장을 보관할 때 쓰던 백자와 함께 전남 진도 흑마늘, 경북 예천 보리 등 각 지역 토산물을 선보여 풍성한 맛과 멋을 뽐냈다.


<금호미술관 ‘키친-20세기 부엌과 디자인’전>
붙박이 싱크대와 조리대, 수납장이 하나로 이어진 지금의 부엌은 언제 처음 만들어졌을까. 그리고 왜 생겨났을까.
그 답이 궁금하면 금호미술관에서 열리는 ‘키친(kitchen)-20세기 부엌과 디자인’전을 보라. 현대 부엌의 디자인을 시대상과 맞물려 살펴볼 수 있는 기획전이다. 1920년대를 시작으로 부엌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빈티지 부엌 13점과 그릇·도구·가전 등 주방용품 400여 점을 한 곳에 모았다.
우선 답부터 찾아보면 시스템 부엌의 효시는 ‘프랑크푸르트 부엌’이다. 1926년 오스트리아 최초의 여성 건축가 마가레테 쉬테-리호츠키가 설계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 진행된 주택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한 그는 6.5㎡ 안에 모든 것을 갖춘 주방 모델을 선보였다. 주방 설비의 표준화를 원한 국가 정책, 1920년 포디즘이 반영된 결과다.
2층 한가운데 놓인 이 부엌은 실제로 보면 더 놀랍다. 냄비 건조대는 바닥을 기울여 걸어 놓으면 저절로 물기가 빠지도록 했고, 식기 건조대는 수납장 바로 아래 설치해 동선을 줄였다. 알루미늄으로 만든 양념 통에는 내용물의 이름과 눈금을 표시했으며, 싱크대의 푸르스름한 회색은 파리가 달라붙지 않는 색을 연구해 칠해 효율의 극치를 보여준다.
시대를 읽을 수 있는 건 1950년대 ‘포겐폴 부엌’도 마찬가지. 특징은 모듈화다. 가로 60cm로 제작된 흰색 캐비닛 큐브로 사이즈를 규격화한 것인데, 당시 점점 서로 다른 모양의 주택이 생겨나자 탄생한 디자인이다. ㄴ자, ㄷ자 등 배치를 공간에 따라 바꿀 수 있게 됨으로써 동선을 최적화하는 부엌이 만들어졌다.
50년대 레이몬드 로위가 디자인한 ‘룩 키친’에서는 ‘시대 정신’을 읽을 수 있다. 부엌 디자인에 처음으로 유선형을 적용시켜 유려하게 둥글린 모서리와 반들반들한 광택, 이음새 없는 매끄러운 실루엣을 자랑했다. 속도를 극대화하기 위해 앞 부분을 둥글게 만든 증기 기관차에서 착안했다. 기술의 발전이 장밋빛 미래를 가져올 거라 믿었던 당대의 들뜬 분위기에 딱 맞춰 인기를 모았다.
이후 60∼70년대에는 수납공간 배열에 신경을 쓴 부엌이, 80∼90년대 들어서는 효율성과 위생을 강조한 부엌이 주류가 됐다. 독일의 가구회사 불탑이 98년 선보인 ‘시스템 20’은 가벼운 알루미늄을 사용해 이동이 쉽고, 분리와 조립이 가능한 디자인이다.
전시는 부엌의 변천사와는 별개로 ‘부엌의 조형성’이라는 또 다른 축으로 구성돼 있다. 50cm 너비의 큐브 형태에 바퀴가 달려 어디서든 이동이 가능한 ‘미니 키친’(1963), 철 기둥을 중심으로 싱크대·레인지·조리대 등 부엌의 주요 기능이 마치 가지처럼 펼쳐져 있는 ‘키친 트리’(1983) 등이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지하에 전시된 예술가들이 만든 주방 용기들도 놓치지 말아야 할 볼거리다. 바우하우스 출신의 독일인 빌렘흘 바겐펠트가 만든 사각형 유리 용기는 1938년 제작된 것이지만 지금 우리가 쓰는 락앤락과 다를 바 없다. 시대를 앞서 주방을 꾸민 예술가들의 아이디어가 신기하기도 놀랍기도 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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