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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가 만난 사람] 경쟁해야 경쟁력 생긴다는 신념있어 매국노 질타 견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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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8호 21면

김철수 미 매사추세츠주립대 석·박사, 상공부 통상진흥국장·차관보, 상공자원부 장관(1993~94), 세계무역기구 사무차장(1995~99), 세종대 총장(2001~2005) 역임, 현 리인터내셔널특허법률사무소 상임고문.

한국 통상 인맥의 ‘대부’로 불리는 김철수(73·사진) 전 상공자원부 장관.

김철수 WTO 전 사무차장

그가 40여 년 동안 통상 분야에서 일해 온 경험 등을 한데 모은 책 『통상을 넘어 번영으로: 경제발전과 한국의 통상』(도서출판 좋은 땅)을 다음 달 초 출간한다. 국제 무대에서 한국이 주요 통상 문제에 어떻게 대응해왔는지를 다룬 영문집 『Trade Winds of Change: Korea in World Trade』와 함께 발간될 이 책에는 1980년대 이후 한·미 간 통상마찰이 심했던 시기의 협상 비화와 한국인 최초로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 선거에 도전했던 일화 등이 자세히 담겨 있다. 비록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진 못했지만 아시아 국가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WTO 사무차장에 임명됐던 김 전 장관은 퇴임 이후 2005년부터 특허법률사무소 리인터내셔널 산하의 무역투자연구원 이사장을 맡아 후진 양성에 매진해오고 있다.

지난 26일 기자와 만난 김 전 장관은 “그동안 국제 통상계에서 한국의 위상이 몰라보게 달라졌다”며 “한국이 주요 통상 국가로 가는 길목에서 겪었던 도전과 기회의 발자취를 돌이켜보고자 책을 내게 됐다”고 밝혔다. 다음은 일문일답.

1994년 4월 모로코 미라케시에서 타결된 우루과이 라운드 최종 의정서에 서명하고 있는 김철수 당시 상공부 장관. [중앙포토]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WTO 퇴임 후 1999년 서울로 돌아와 세종대에서 3년 동안 통상을 가르치다 총장을 맡았다. 2005년부터 이곳에서 10년째 통상 관련 연구와 컨설팅을 맡고 있다. 통상 분야에서만 40여 년 일해왔는데 나이가 들면서 이제 그동안의 경험을 정리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에 책을 만들게 됐다. 그동안 한국의 통상 정책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내 경험을 통해 변화의 발자취를 기록으로 남겨 보면 후배들에게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어떤 내용이 담겨 있나.
“한·미 통상 협상 수석 대표,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의 우루과이 라운드(UR) 실무 수석 대표 등 거의 모든 주요한 통상 협상에 참여했던 경험들이 담겨 있다. 모든 협상 과정마다 국민에게 많은 설명이 필요했었다. 당시 정부가 왜 이런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지 등을 설명했던 강연이나 논문 등도 함께 모아 문집으로 엮었다.”

한인 첫 국제기구 요직 경험 담은 책 발간
-가장 기억에 남는 협상을 꼽는다면.
“89년 미국과 벌였던 수퍼 301조 우선 협상국 지정 협상이다. 당시 미국이 무역법의 보복조항인 301조에 근거해 한국을 불공정무역국으로 지정하려고 했는데 우리가 불공정무역국이 아니라는 것을 미국에 설득했던 협상이다. 대외 협상보다 국내의 다른 부처와의 대내 협상 과정이 굉장히 어려웠다. 투자 자유화와 농산물 시장 개방 문제가 가장 쟁점이었는데 다행히도 큰 양보 없이 미국과 협상을 마무리해 한·미 통상 관계를 진전시켰다고 자평한다.”

-UR 협상도 파장이 대단했었다. 당시 우루과이가 왜 우리나라를 괴롭히느냐는 웃지 못할 이야기까지 나왔었는데.
“WTO의 전신인 GATT가 우루과이에서 개최된 각료회의에서 새로운 무역질서를 제창해 논의가 시작된 국제 통상 규범 협상이었다. 시장개방 논란 속에 협상 과정에서 국무총리 2명과 농림수산부 장관 등 3명의 각료가 사임하는 등 엄청난 파고를 겪었다. 쌀 시장개방 문제로 큰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 국민이 UR에 대해 균형감각을 갖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 큰 성과라 할 수 있다. 통상국가로서의 한국에 유리한 점들을 국민에게 잘 부각시켜 설득한 결과라고 본다.”

-당시엔 개방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심했다.
“수출은 더 할수록 좋지만 수입은 안 하면 안 할수록 좋다는 시각이 팽배하던 시절이었다. 이 때문에 ‘한국은 중상주의 국가’라는 시각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돼 있었다. 한국이 80년대 중반부터 무역흑자를 기록하면서 그런 시각은 더욱 강해졌다. 그래서 통상 문제 해결 없인 경제적으로 성장할 수 없다는 인식을 정책 입안자들과 국민에게 심어주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많이 난다. 하루아침에 생각이 바뀔 순 없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나 자신도 ‘매국노’라는 질타까지 받았었다. 그럼에도 국민과 정부 내 사람들에 대해 꾸준히 설득에 나섰다. 사실 상공부 내에서도 통상 현안을 놓고 산업과 통상 쪽 입장이 서로 상반되는 경우가 있었다. 집안 단속하는 일만 해도 녹록하지 않았다.”

수퍼 301조 협상 가장 기억에 남아
-왜 이렇게 험한 통상분야를 택하게 됐나.
“돌이켜보니 우연 같은 일이었다. 원래 전공은 정치학이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보니 때마침 상공부에서 해외 박사들을 대상으로 한 과장급 공무원 특채가 있었다. 당시 김영봉 중앙대 교수, 김달중 연세대 교수와 함께 뽑혔다. 이후 미국 담당(시장3과) 과장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게 통상 경력의 시작이 됐다. (과장급 특채는 이례적인 것 아닌가) 71년 10억 달러 수출을 달성하면서 대외적으로 통상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그때 상공부 내엔 대외 통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인프라는커녕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전문인력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이낙선 당시 장관이 해외 전문인력 양성 차원에서 유학파 출신 3명을 특채로 채용토록 결정한 것이다.”

-내부 반발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처음엔 낙하산으로 과장 자리를 꿰찼다고 미움도 많이 받았었다. 처음 3년 동안은 술 한잔 같이 먹자는 말도 못 들어볼 정도였으니. 통상 관련으로는 문외한이었지만 배워가면서 일했다. 일에 매달리다 보니 사람들도 따라오더라. 1년에 넉 달 이상 해외에 협상하러 나간 적도 있었다.”

-어떤 신념이 한국이 통상 국가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나.
“‘경쟁을 해야 경쟁력이 생긴다’는 생각을 일찍부터 갖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세계 속에서 문을 닫고는 살 수 없는 나라다. 세계화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우리가 그 뒤에만 머물러 있게 되면 결국 우리만 손해를 보기 때문에 개방하고 앞서 나가는 자세로 정책을 구사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WTO 이야기를 해보자. 사무총장에 출마하게 된 동기는.
“그때만 해도 한국인이 WTO의 수장이 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UR이 끝나면서 WTO가 출범했는데, 91년 1월 뉴질랜드 통상장관이 한국을 방문해 자기를 WTO 사무총장으로 지지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때 우리 외교부에서 ‘뉴질랜드 장관도 나간다는데 한국 장관이 사무총장에 출마 못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래서 한승주 당시 장관이 나에게 출마를 권유해 나가게 된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이 ‘세계화’를 주창하면서 국제 무대에 한국 사람을 많이 진출시켜야 한다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도 영향을 미쳤다.”

-결국 최종 선거를 포기하고 사무차장으로 가게 됐다.
“선거에 나가보니 살리나스 전 멕시코 대통령과 같은 막강한 후보자가 많았다. 하지만 일본과 호주를 포함한 30여 개 아시아·중동 국가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상당히 경쟁력을 갖춘 후보로 부상할 수 있었다. 솔직히 승산이 있다고는 생각 안 했지만 한국에서 국제기구의 사무총장직에 도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결국 루지에로 이탈리아 통상장관과 최종 3차 투표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더 이상 우리 세가 늘어나지 않는데다 만장일치로 후보를 뽑는 게 WTO의 전통이어서 양보한 것이다. 이후 아시아 국가를 대표해 사무차장직을 맡아달라는 제의가 와서 수락하게 됐다.”

WTO서 중국 가입 실무협상 지휘
-WTO 재직 당시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
“내가 사무차장으로 있는 4년 동안 가장 큰 이슈였던 중국의 WTO 가입이다. GATT 시절 때부터 15년 동안 계속 돼오던 가입 협상 마지막 단계에서 실무를 총괄하는 사무차장으로 중국과 협상을 벌였다. 중국이 WTO 가입 이후 책임 있는 회원국의 하나로 WTO 규범이나 가입 조건을 양호하게 준수하고 있어 보람을 느낀다.”

-최근 자유무역협정(FTA)과 같은 지역별 협상이 활발하게 이뤄지면서 세계를 하나의 통상 규범으로 묶으려는 WTO에 대한 무용론도 나오고 있다.
“WTO의 새로운 통상 규범인 뉴 라운드 협상이 지지부진해지면서 생각이 비슷한 나라끼리 모여 FTA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전면적인 무역 자유화를 이루기 위해선 FTA와 WTO 양자·다자 간 트랙을 모두 진행시켜야 한다. 특히, 세계 무역의 블록화 현상은 WTO만이 극복할 수 있다. WTO에서 160여 개 회원국이 모여 합의를 이루려 하다 보니 결정이 쉽지 않지만 지난해 말 발리 각료회담 이후 진전을 보이고 있어 곧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 기대한다. 모든 것을 다 합의할 때까지 협상하는 ‘일괄타결(single-undertaking)’ 방식의 현행 WTO 의사결정 과정을 진전을 이룬 부분부터 먼저 타결하는 방식으로 개혁하는 것도 향후 과제다.”

-우리나라가 참여를 검토 중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협상에 대해 조언한다면.
“우리 정부가 TPP 가입 검토를 결정한 게 너무 늦지 않았나 생각한다. 마지막 단계에 들어선 TPP 협상에 이제라도 들어가는 것이나 협상이 타결된 후 별도의 참여 협상을 벌이는 것 모두 우리에게 유리한 조건을 얻어내기가 쉽지 않은 형국이다. 협상에 빨리 참여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통상·협상 전문가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한 말씀 해준다면.
“우선 외국어 실력과 함께 국제적인 감각을 키워야 한다. 협상에 임해서는 먼저 상대방을 잘 파악해야 한다. 늘 가방을 가지고 다니는 습관이 아직까지 있다. 상대방에 대한 파악을 위해 집에 서류를 가지고 가서 공부하던 버릇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처한 입장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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