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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락가 '가부키초' 민낯 앵글에 … 야쿠자 찍다 감금되기도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2008년 8월 일본 도쿄(東京) 번화가 가부키초(歌舞伎町)에서 ‘묻지마 범죄’가 일어났다. 30대 여성 한 명이 얼굴과 머리를 칼로 베이는 사고였다. 당시 인근에 있던 다큐사진작가 권철(47)씨는 허겁지겁 사건현장으로 달려갔다. 경찰 순찰차보다 5분 먼저 도착했다. 그리고 셔터를 눌렀다. 피해 여성이 실려가는 모습, 주변에서 웅성거리며 구경하는 군중을 렌즈에 잡았다.

 권씨는 그때를 생생하게 기억했다. “이후 일본 각지에서 비슷한 사고가 연쇄적으로 일어났어요. 세상이 걱정스러웠죠. 그런데 더 속이 뒤집히는 일이 있어요. 현장에 남아 있는 핏자국 앞에서 호스트바에서 일하는 젊은 친구들이 V자를 그리며 기념촬영을 하더라고요.”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현대인의 초상화다. 권씨는 1996년부터 가부키초의 낮·밤과 함께해 왔다. 지난 18년간 카메라 하나를 메고 골목골목을 누볐다. 가부키초는 요즘 유행어를 빌리면 ‘낮져밤이’다. 낮에는 지고 밤에는 이기는, 즉 낮에는 한산하고 밤이면 사람들이 밀려드는 곳이다. 아시아 최대 환락가다. 술과 도박, 마약과 매춘, 호객꾼과 취객, 경찰과 야쿠자, 그리고 부(富)와 빈(貧)이 교차한다.

 권씨가 가부키초의 민낯을 보여주는 사진집 『가부키초』(눈빛)를 냈다. 지난해 일본에서 나온 책은 출판명가 고단샤(講談社)가 선정하는 ‘2013 출판문화상’ 사진 부문에 선정됐고, 이번에 한국어 번역본이 출간됐다. 20일 만난 권씨는 눈빛이 날카로웠다. 스포츠 머리에 점퍼 차림, 군살 없는 몸집 등 날렵한 맹수를 닮아 보였다.

다큐사진작가 권철씨에게 카메라는 세상의 어둠과 고통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 왜 가부키초인가.

 “인간의 밑바닥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가부키초는 전쟁터다. 사람을 사고팔고, 싸움이 끊이지 않고…, 일본의 오늘을 보여주는 최전선이다. 아파트로 치면 모델하우스 같다. 그 속에 꿈틀대는 욕망과 본능을 주목했다. 제3자 시선으로, 사심 없이, 가감 없이 기록했다.”

 - 끈기와 집념이 대단하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일주일에 6일은 가부키초를 찾는다. 금·토요일에는 철야를 하며 취재한다. 만보계로 약 3만 보, 거리로 약 20㎞를 걷는다. 사는 집도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다. 사고가 나면 바로 뛰어갈 수 있도록 머리맡에 카메라를 두고 자고, 신발 앞부분도 현관문 방향으로 정돈해 놓는다. 체력은 평소 수영으로 다진다. 선수 수준은 아니지만 인명구조 자격증도 있다.”

 - 위험하지 않은가.

 “불량배를 가까이서 찍으려고 하다가 카메라 석 대가 망가지기도 했다. 야쿠자에 잡혀 빌딩 지하에 감금된 적이 있다. 어떤 조직에서 ‘보호료’를 내면 지켜주겠다’고 몇 번 요구해 왔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중립이 요구되는 저널리스트가 이해관계에 묶이면 안 된다.”

 - 에피소드를 하나 든다면.

 “야쿠자 조직으로부터 긴박한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우리 형님 싸우는 장면을 찍었지. 몇 장 넘겨라’고 했다. ‘그건 곤란하다’고 답했다. 사무실로 오라고 해서 갔더니 손가락 절단도구가 보였다. 공포가 밀려들었다. 그런데 당시 교도소에 있던 ‘형님’이 주변 수감수에게 무용담을 자랑하려고 그때 찍은 사진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는가. 웃음이 나왔다.”

 - 가부키초에 다른 사진작가는 없나.

 “매춘업소를 몰래 찍거나 유명 스타를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 카메라를 숨기고 다닌다. 저처럼 카메라를 내놓고 다니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이젠 얼굴이 많이 알려져 예전처럼 살벌하진 않다. 시작한 지 10년쯤 지나니 야쿠자들이 직접 문신도 보여주며 사진을 찍게 해주더라.”

 가부키초는 한국인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바로 옆 오쿠보(大久保)에 코리아타운이 형성돼 있고, 일본 내 한류열풍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응원소리도 메아리쳤다. 권씨는 “1945년 일본이 패망할 당시 가부키초에는 한국인이 많이 살았다. 빠찡코 도박장을 열고, 불고깃집을 운영하고 등등. 64년 도쿄 올림픽 때 정화(淨化)라는 명목으로 많은 조선인이 쓰레기매립장이었던 에다가와(枝川)로 강제 이주되는 슬픈 역사도 있다”고 말했다.

 - 한국인이라 더 힘들지 않나.

 “2011년 일본 우익들의 반한 시위가 한창이었을 때 ‘조센진’이라는 소리를 처음 들었다. ‘조센진 때려 죽이자’라는 구호도 있었다. 19, 20세기도 아니고 21세기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일본 정부는 왜 막지를 못하는지 실망이 컸다. 권력의 생리를 체감했다.”

 - 갑자기 권력이라니.

 “가부키초는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 ‘도의적(道義的)’ 번화가 건설을 명분으로 세워졌다. 그런데 지금은 일본의 ‘하반신 문화’를 상징하는 장소다. 과거 몇 차례 정화작업이 있었지만 영원히 정화되지 않는 마을로 남을 것이다. 정치권은 그때그때 상황을 이용할 뿐이다. 적을 만들어 무기를 팔아먹는 것과 비슷하다.”

 권씨는 스스로를 ‘한 마리 고독한 늑대’에 비유했다. 무리에 섞이지 않는 야수처럼 혼자만의 길을 뚫어왔다는 뜻이다. “잡지사·통신사에서 일할 기회도 있었지만 그 어떤 배경도 싫어 조직에 안주할까 봐 ‘도코다이(獨對)’를 택했다”고 했다.

 권씨의 활동 폭은 넓다. 일본 한센병 환자, 2008년 중국 쓰촨(四川)성 대지진, 2011년 일본 동북부 대지진 등에 앵글을 맞춰왔다. 주제 하나를 잡으면 끝을 보는 성격이다. 2005년에는 강제철거 위기에 놓인 오사카(大阪)의 조선인마을 ‘우토로 살리기’를 이슈화시켰고, 2012년에는 도쿄 신주쿠(新宿)에서 ‘한류 10년’ 전시를 열기도 했다. 그는 “해병대 시절 저격수로 복무했던 게 에너지가 된 것 같다. 총 대신 카메라를 들었을 뿐 저격수 기질은 그대로다. 카메라는 총만큼 무서운 것”이라고 했다.

 - 사진 입문 과정이 궁금하다.

 “대학(관동대)에서 토목을 전공했다. 잠시 사진동아리 활동을 했을 뿐이다. 앞길이 안 보이고, 한국이 갑갑해 1994년 일본으로 훌쩍 떠났다. ‘아이우에오(あいうえお)’부터 익혔다. 일본사진예술전문학교에서 삶의 스승인 히구치 겐지(<6A0B>口建二) 교수를 만났다. 원전의 위험성을 일찍부터 경고해온 분이다. 어떤 단체에도 속하지 않은 진정한 프리랜서였다. 다큐사진에 눈을 뜨게 됐다.”

 - 자연·예술사진은 안 보인다.

 “처음에는 예쁜 사진도 찍었다. 97년 일본 한센병 환자 사쿠라이 데쓰오(櫻井哲夫)와 연을 맺으며 사진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다. 얼굴이 뭉개지고, 눈이 멀고, 온몸에 감각이 없었지만 그는 되레 자신을 멸시해온 사람들을 위로하는 시를 써 왔다. 인간의 진한 냄새를 맡았다. 인간의 존엄성을 목격했다. 한센병 환자를 아우슈비츠 같은 곳에 강제 수용했던 일본의 차별문화도 알게 됐다. 99년 그의 모습을 알리며 사진작가로 데뷔했다. 그의 일상을 돌아본 『뎃짱! 한센병에 감사한 시인』은 올해 도쿄북페어에서 뽑은 ‘지금 꼭 읽어야 할 책 30권’에 포함됐다.”

 -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나.

 “6년 전 『가부키초 고코로짱』이라는 사진집을 냈다. 4살짜리 홈리스 소녀 고코로(心)를 1년 동안 밀착해 찍은 사진으로 일본의 빈곤 문제를 고발했다. NHK방송 등 30여 매체와 인터뷰를 했다. 일본사회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얼마 후 정부에서 가부키초에 ‘거리의 아이들(Street Children)’은 없다고 발표하자 갑자기 언론도 잠잠해졌다. 그 이유를 지금도 모르겠다. 일본의 치부가 노출돼서였을까.”

 -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후쿠시마(福島) 대지진 현장을 네 차례 다녀온 후 우울증에 걸리기도 했다. 사람들이 처참하게 죽어가는데 나는 왜 살아 있을까, 딜레마가 컸다. 일본 생활 20년을 정리하고 다음 달 제주도에 새 둥지를 튼다. 다큐사진 시장이 열악한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을 두고 정신 나간 짓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한국과 일본의 중간에서 양쪽을 차분하게 살펴보려고 한다. 과거를 바로 알아야 오늘이 있고 미래도 있지 않겠는가. 한국과 일본을 잇는 다리 역할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글=박정호 문화·스포츠·섹션 에디터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다큐 사진 잘 찍는 노하우 5가지

도처에 사진이 넘친다. 디지털카메라에 이어 스마트폰이 일상 깊숙이 들어오면서 모두가 사진가가 되는 시대가 열렸다. ‘호모 디카쿠스(Homo dicacus·사진 찍는 인간)’라는 단어가 생길 정도다. 하지만 찍는다고 다 사진이 되는 것은 아닌 법. 권철씨로부터 사진 잘 찍는 노하우 5가지를 들어봤다.

 ①절제된 플래시=스트로브(Strobe·스틸 카메라에 쓰는 전자 플래시)에 이별을 선언하라. 인위적 조명을 쓰면 자연스러운 작품을 빚을 수 없다. 밤에도 마찬가지다. 나는 절대 스트로브를 사용하지 않는다. 카메라의 오토포커스(자동초점) 기능도 항상 꺼 놓는다.

 ②셔터 남발 금지=아무 데서나 카메라를 들지 않는다. 값비싼 카메라 두세 대를 자랑이라도 하듯 어깨에 메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 카메라는 기민해야 한다.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려면 인내심을 길러야 한다. 셔터를 남발한다고 좋은 장면을 찍는 게 아니다.

 ③상상은 금물=미리 앵글과 구도를 상상하지 않는다. 현장은 언제나 유동적이다. 이 때문에 촬영 전에 밑그림을 구상한다고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동물적인 감각으로 순간을 낚아채는 훈련이 필요하다. 사건사진일 경우 더욱 그렇다.

 ④감각 매뉴얼화=예쁘고 아름다운 것만 사진은 아니다. 거칠더라도 자신만의 개성과 색깔을 드러내야 한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지나친 치장은 득보다 실이 많다. 피사체에 애정을 갖고 찍고 또 찍으며 자신만의 감각을 매뉴얼화한다.

 ⑤문제는 체력=사진은 몸으로 하는 예술이다. 모든 게 그렇듯 사진의 기초도 체력이다. 전방 100m에 있는 여인의 얼굴을 알아챌 수 있을 정도의 눈매를 키워야 한다. 20대 젊은 경찰의 스피드를 따라잡을 수 있을 만큼 몸을 연마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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