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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14좌 베이스캠프를 가다 <24>에베레스트·로체(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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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쿵에서 바라본 로체 남벽. 히말라야 거벽 중에서 가장 거대한 벽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 4위 봉 로체(Lhotse·8516m)는 에베레스트(8848m)와 맞붙어 있다. 남쪽에서 바라볼 때 두 봉우리는 알파벳 ‘M’자 모양을 하고 있는데, 오른쪽에 우뚝 솟아 있는 것이 로체다. 특히 남쪽에서 바라보는 로체 벽은 히말라야 암벽 중에서 가장 거대하고 웅장하다. 그 앞에 서면 누구나 자연의 위대함에 고개가 숙여진다. 등반 난이도도 다른 벽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험난하다. 지난 1월 ‘히말라야 14좌 베이스캠프를 가다’ 시리즈의 마지막 봉우리로 로체 남벽 베이스캠프(5250m)를 찾았다.

1 해질 녘 추쿵에서 바라본 남쪽 하늘. 남서쪽 벽이 붉게 물들고 있다.

2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야크.

3 딩보체에서 추쿵 가는 길에 있는 케른.

천혜의 전망대 추쿵

지난 1월 22일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5350m)에서 내려와 페리체(Periche·4200m) 로지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몸을 추슬렀다. 해발고도 1000m가량을 내려온 덕분에 고소 증세는 말끔히 사라졌다. 다음 목적지인 로체 베이스캠프로 가려면 페리체에서 동쪽으로 길을 잡아야 한다.

 다음날 오전 딩보체(Dingboche·4400m)를 거쳐 추쿵(Chukhung·4600m)까지 곧장 올라갔다. 배낭 무게는 여전히 25㎏이었지만, 고소 증세가 사라져 발걸음은 새털처럼 가벼웠다. 마을과 마을의 간격은 한두 시간 거리로 점심 전에 추쿵에 닿을 수 있었다. 여기서 베이스캠프까지는 서너 시간이면 갈 수 있다.

 추쿵은 벌써 세 번째 방문이다. 2007년 엄홍길(54·밀레) 대장이 이끄는 ‘로체남벽·로체샤르남벽원정대’ 일원으로 이 마을을 들른 적이 있다. 2009년 다시 로체남벽원정대와 함께 추쿵을 찾았다. 그때에 비하면 몰라보게 발전했다. 당시 두세 개에 불과했던 로지가 10여 개로 늘었다. 한겨울에도 아이들이 골목에서 뛰놀 만큼 마을엔 활기가 넘쳤다. 하지만 예전에 인연을 맺은 몇몇 친구는 보이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으니 “추위를 피해 카트만두로 내려갔다”고 했다.

 추쿵 마을 위쪽에 있는 한 로지에 여장을 풀었다. 에베레스트와 로체 남벽을 등지고, 동쪽으로 아마다블람(Ama Dablam·6856m)과 남쪽으로 로부체피크(Lobuche Peak·6145m)를 조망할 수 있는 천혜의 전망대였다. 로지 뒤편 언덕에서 따사로운 볕을 탐닉하며 여유롭게 한때를 보냈다. 예전에 원정대 일원으로 들렀을 때는 이렇게 아름다운 마을인 줄 알지 못했다. 정상 등정을 목표로 하는 원정대는 베이스캠프로 가는 도중에 있는 마을은 휙 지나치기 때문이다.

 내가 가야 할 목적지는 추쿵 리(Chukhung Ri·5550m)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추쿵 리 못 미치는 지점에 있는 펑퍼짐한 언덕이었다. 해발고도는 5000m 정도였다. 언덕에 서면 거대한 로체 남벽과 눕체(Nuptse·7861m) 능선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해 질 녘에 맞춰 이 언덕을 오르기로 했다. 이미 고소 적응이 돼 있었기 때문에 한 시간이면 충분히 오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오후 4시에 로지를 떠나 언덕으로 향했다. 겨울 해는 대략 오후 5시쯤 서쪽 능선으로 떨어졌으므로 이때가 적기였다. 금빛 석양을 한껏 받은 로체 남벽을 촬영할 요량이었다.

 흙과 모래를 밟고 오르는 길은 부드러웠다. 예상보다 빨리 언덕에 도착했다. 남쪽으로 5000~6000m급 설산이 눈 아래에 있었다. 북쪽으로는 거대한 로체 남벽과 눕체 능선이 펼쳐졌다. 푸른 하늘 아래 거대한 커튼이 드리워진 세상 같았다. 2주일 전 트레킹 시작점에서 본 여정의 목적지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세상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멋진 풍경이었다.

 짧은 겨울 해는 서쪽보다는 남쪽을 향해 떨어졌다. 그래서 석양이 로체 남벽에 그대로 쏟아졌다. 그때 한 줄기 구름 띠가 몰려와 거벽을 가로질러 지나갔다. 석양이 검은 벽과 흰 구름 띠를 함께 비췄고, 구름 띠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시린 손을 비비며 어스름이 깔릴 때까지 그 광경을 지켜봤다.

녹아내리는 로체 남벽의 빙하

다음날 오전 8시 로지 여주인이 내주는 버섯수프로 간단하게 끼니를 때운 뒤 로체 베이스캠프로 향했다. 카메라만 달랑 들고 배낭도 벗어놓고 물도 챙기지 않았다. 베이스캠프까지 갔다 로지로 되돌아올 때까지 6시간 정도 걸릴 것이다. 옷은 출발할 때부터 따뜻하게 입었고, 마실 물은 빙하에서 구하면 문제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물론 고소 적응이 된 상태여서 가능한 행동이다.

 추쿵에서 베이스캠프로 가는 길은 거대한 빙하를 거슬러 올라간다. 폭이 1㎞가 넘는 거대한 빙하다. 길은 삭막하고 황량했다. 길 위로 눈이 소복이 쌓여 야크마저도 자취를 감췄다. 길 위엔 아무것도 없었다. 초행길이었다면 혼자 나설 엄두도 못 냈을 테지만, 원정대와 함께 두 번이나 왔던 길이라 별 어려움 없이 갈 수 있었다. 북쪽으로 거대하게 솟은 로체 남벽이 나침반 역할을 해주었다.

 빙하 끝에 있는 베이스캠프에 도착했을 때는 낮 12시가 다 됐다. 꼬박 4시간이 걸린 셈이다. 캠프 사이트에는 돌무더기가 여러 개 있었다. 다른 원정대가 쌓고 간 흔적이다. 두 번의 원정을 합쳐 이 삭막한 빙하에서 텐트를 치고 꼬박 석 달을 살았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정말 비루한 날들이었다.

 빙하 끝에서 거대한 로체 남벽을 마주하고 앉았다. 이 벽은 아직 ‘신성불가침의 벽’으로 남아 있다. 1973년 일본 원정대가 첫 도전장을 낸 이래 40년 동안 어느 누구도 이 벽에 길을 내지 못했다.

 한때 이 벽을 올랐노라고 주장한 산악인들이 있었다. 1990년 당대 최고의 산악인으로 손꼽히는 토모 체슨(55·슬로바키아)이 단독으로 로체 남벽을 등정했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같은 해 등정한 러시아팀에 의해 등정 의혹이 제기됐다. 러시아는 고정 로프를 설치하며 등정했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에 더 일리가 있었다. 토모 체슨의 등정 의혹을 제기한 러시아팀마저 이후 등정 의혹에 휩싸였다. 러시아팀도 정상부 등반을 설명할 사진이 없었고, 구두 진술마저 정황이 맞지 않았다.

 로체 남벽은 ‘쿨르와르(Couloir)’라고 불리는 거대한 빙하 계곡이 특징이다. 거벽에서 끊임없이 빙하가 흘러내리면서 큼지막한 반원통 계곡을 만든 것이다. 5년 만에 다시 보는 남벽의 쿨르와르는 더 깊어보였다. 눈에 띌 정도로 빙하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벽에 기둥이 솟은 것처럼 보였다.

 내려오는 길에 말라 죽은 설연화(雪蓮花) 몇 포기가 눈에 띄었다. 설연화는 ‘눈 속의 연꽃’으로 히말라야 5000m 지대에서만 볼 수 있는 신비의 꽃이다. 빙하 바닥에 바짝 붙어 꽃을 피우는데, 꽃잎 주변으로 거미줄처럼 엷은 막을 친다. 지금은 바싹 말라 죽어 있었지만, 줄기가 눈 속을 뚫고 올라와 있었다.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니 설연화 천지였다. 야크 말고는 누구도 찾지 않는 곳이라 잘 보존된 듯했다. 로체 남벽은 2009년 이후 원정대가 찾지 않았다. 일부러 이 오지를 찾는 트레커도 드물다. 그래서 더 신비했다.

로체(네팔)=김영주 기자
사진=이창수 사진작가

에베레스트·로체 BC 트레킹 정보

지난 1월 13일부터 시작된 에베레스트·로체 베이스캠프 트레킹은 2주 정도 걸렸다. ‘25㎏의 배낭을 메고, 하루 20㎞ 이상씩 걷겠다’는 ‘히말라야 20-20클럽’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네팔관광청은 ‘FIT(Free Individual Trekker)는 트레킹 도중 가이드와 짐꾼을 고용 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실상은 달랐다. 길을 걷는 도중에 얼마든지 가이드와 짐꾼을 구할 수 있었다. 트레킹 중간에 서너 번 체크 포스트를 통과했지만, 규정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경찰은 한 명도 없었다. 에베레스트·로체가 있는 쿰부(Kumbu) 빙하 계곡은 네팔에서도 숙박 시설이 가장 잘 된 곳이다. 비수기인 여름과 겨울에는 얼마든지 방을 구할 수 있다. 성수기인 봄·가을에는 붐비는 편이지만 예약제가 아니어서 빨리 도착하면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준비물은 최대한 적게 갖고 가는 게 좋다. FIT에게 카메라는 필수여서 줄일 수 있는 것은 옷뿐이다. 처음부터 ‘한 번 입은 옷은 2주 입는다’는 생각으로 준비하는 게 좋다. 물이 있어도 어차피 너무 추워서 씻을 수가 없다. 배낭 무게는 20㎏을 넘기지 않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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