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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철학잡지, 26년간 살아남은 비결은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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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철학의 대중화’를 표방하는 계간지 ‘철학과 현실’이 통권 100호를 맞는다. 본격적인 민주주의와 자유화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던 1988년, 부정기적인 무크지로 첫 호가 나온지 26년 만이다.

 이번 주 시중에 깔리는 100호(2014년 봄호)의 특집은 최근 지식사회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른 ‘융합’에 대한 좌담으로 꾸몄다. 철학자와 자연과학자가 한데 모여 ‘convergence’, ‘fusion’, ‘consilience’ 등 융합에 해당하는 다양한 영어 표현에 대한 개념 정리와 현재 학계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융합의 실태 등을 짚었다. 철학자 이명현·엄정식·김광수·강영안·김상환, 자연과학자 김선영·이덕환·소광섭·김혜숙 등 16명의 전문가가 4시간 반 동안 벌인 좌담을 정리한 기획이다.

 녹록치 않은 우리의 출판 시장에서 철학 분야를 다루는 잡지가 20년 넘게 살아남았다는 점은 이례적이다. 잡지 편집총괄을 맡고 있는 엄정식 서강대 명예교수는 “창간 당시에는 여기까지 오리라고 생각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잡지의 발행인인 이명현 서울대 명예교수는 “일종의 사회공익사업을 한다는 심정으로 벌인 일”이라고 소개했다. 구독료나 광고 수입으로 굴러가는 잡지가 아니라는 얘기다.

 한국의 서양철학 연구 1세대는 국민교육헌장 초안을 작성한 박종홍(1903∼76) 전 서울대 교수다. 잡지는 2세대 철학자인 김태길(1920∼2009) 전 학술원 회장이 사재를 털어 시작했다. 그가 내놓은 종잣돈으로 부동산을 구입했고, 거기서 나오는 수익으로 잡지의 모태인 철학문화연구소를 운영하고 잡지 출간비용도 댄다.

 엄 교수는 “김태길 선생님은 국내에 철학적 방법론을 처음 도입한 분”이라고 설명했다. 똑같이 지혜를 추구하지만 철학이 종교와 다른 점은 무조건적인 신념이 아니라 논리적 추론을 거친다는 점이다. 김태길에 의해 소개된 분석철학적인 연구 흐름이 잡지를 통해서도 확산됐다.

 엄 교수는 또 “‘철학의 현실화, 현실의 철학화’가 창간 당시부터 잡지의 모토(신조)”라고 밝혔다. 우리 삶과 직접 연관된 각종 이슈들을 철학적으로 다룬다는 뜻이다.

 그간 잡지의 특집 목록에는 그런 색깔이 반영돼 있다. 가령 광신적 종교인들의 집단자살극인 오대양 사건의 실체가 드러난 91년 겨울호는 ‘종교와 광신’이라는 주제를 특집으로 다뤘다. 98년에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2010년에는 천안함 폭침 사건을 다뤘다.

 엄 교수는 “김태길 선생님 타계 후 이명현 교수가 발행·편집인을 맡고 나서 잡지가 훨씬 유연해졌다”고 말했다. 특집 사안에 따라 외부 전문가를 그때 그때 영입해 다양한 필자의 글을 받도록 한다는 설명이다. 가령 “안철수 현상을 다룰 경우 정치철학적인 측면에서 글을 써줄 철학자는 물론 정치학자·정치인·사회학자 등 철학 이외 분야의 전문가들로 필자를 구성하는 식”이라고 했다.

 엄 교수는 “그런 변화가 설득력이 있어선지 요즘은 잡지를 찾는 사람들이 오히려 늘어나는 느낌”이라고 했다. “항상 5000부를 찍는데 과거에는 좀 남았었는데 요즘은 다 나간다”고 했다. 잡지는 정부부처·국공립도서관·학교·언론사 등 기관과 국회의원·교사 등에게 배포된다. 서점에도 깔린다. 이 교수는 “구독료를 주면 받지만 내지 않아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철학의 현실화는 잡지가 사회 이슈를 다룬다는 의미다. 현실을 철학적으로 봐야 하는 이유는 뭘까. 엄 교수는 “사태나 사물을 철학적으로 본다는 것은 깊이 본다는 것, 깊이 보면 넓게 볼 수 있다. 깊고 넓게 보면 멀리 보게 된다”고 말했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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