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부문 기자
SBS ‘짝’ 출연 여성 자살사건을 수사 중인 제주 서귀포경찰서가 ‘꼭꼭 숨기기’를 하고 있다. 출연자들이 사전에 서명하는 ‘서약서’를 놓고서다. 경찰은 지난 10일 중간수사 브리핑에서 서약서 내용을 일부 언급했다. ‘참가자는 촬영에 성실히 응하고 제작진의 지시를 이행해야 한다’든가, ‘의무를 위반할 경우 (SBS가)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다고 했다.
논란이 되는 것은 손해배상 관련 부분이다. 출연자가 경력을 속이는 등 ‘신의 성실의 의무’를 어겼다면 손해배상을 청구해 마땅하다. 그러나 ‘의무’가 ‘촬영에 성실히 응하고 제작진의 지시를 이행하는 것’까지 포괄적으로 가리킨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목숨을 끊은 전모(29)씨는 어머니와의 마지막 통화에서 “이대로 방송 나가면 한국에서 살 수 없을 것 같다. 이상하게 편집된 걸 매달려서라도 바꿔 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건 ‘의무 위반’에 해당될 수 있다. 광주지방변호사회 강성두 공보이사는 “전씨가 손해배상 때문에 큰 심리적 압박을 받았을 것”이라며 “제작진이 서약서를 내세워 촬영을 계속했다면 강요죄를 적용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런 점 때문에 취재진은 ‘의무’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경찰에 수차례 문의했다. 하지만 경찰은 시종 ‘알려 줄 수 없다’고 했다. “혐의를 잡기 전인 내사 단계”라는 이유에서였다. 내사 자료를 공개하지 않는 것은 신원이 드러나지 않게 보호하고, 문제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번은 경우가 다르다. 이미 내사 대상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서약서 양식을 공개한다고 내사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 또한 거의 없어 보인다. 조선대 윤일홍(경찰행정학) 교수는 “경찰 스스로 브리핑에서 내용을 어느 정도 밝힌 점으로 볼 때 서약서 공개가 내사에 지장을 준다는 얘기는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서약서 양식은 SBS의 지식재산”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공익성을 담보해야 하는 방송사와 관련해 비극이 벌어진 마당에 지식재산권만 강조하는 건 온당치 않아 보인다.
그렇잖아도 경찰은 한때 SBS에 유력한 증거가 될 수 있는 촬영 영상을 “정리해 넘겨 달라”고 해 ‘눈치보기 수사’라는 비판이 일었다. 국민의 신뢰가 생명인 경찰이 더 이상 그런 소리를 듣지 않았으면 한다.
최충일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