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무더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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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영국에서는 여름 중에 가장 더운 동안을 「도그·데이즈」(Dog Days) 라고 부른다. 보신탕을 먹는 철의 뜻이 아니다. 「시리우스」라는 별이 하늘에 나타나는 동안이라는 뜻이다.
이 동안에도 근엄한 영국 신사들은 두터운 「플래널」옷을 입고 「넥타이」를 반듯이 매고 다닌다. 지겹도록 덥지 않을 턱이 없다. 모두가 꿈쩍도 하기 싫어한다. 그러니 신통한 일이 일어날 까닭이 없다. 그래서 이 동안을 「실리·시즌」(Silly Season)이라고도 한다. 재미없는 철이란 뜻이다.
「I·테일러」라는 세계적인 고대 사가는 또 「로마」제국의 쇠망기를 「도그·데이즈」라고 표현했다. 어떻게 보든 한 여름을 영국 사람들은 조금도 반갑게 여기지 않는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처럼 영국 사람들이 지겹게 여긴 여름은 우리네 여름에 비기면 아무 것도 아니다. 『이 사랑의 꽃봉오리는 여름의 미풍에 마냥 부풀었다가 다음 만날 때엔 예쁘게 꽃필 거예요…. 』「로미오」와 사람을 굳게 맹세한 다음에 헤어지면서 「줄리엣」은 이렇게 말했다.
이처럼 영국에서는 여름에도 미풍이 흔한 것이다. 아무리 덥다 해도 평균 27도의 더위는 견딜 만한 것이다. 우리 나라의 더위는 지난 5일 동안 연일 34도를 오르내렸다. 불쾌 지수도 82를 내려가지 못했다. 앞으로도 이런 무더위는 10여 일이나 더 계속되리라는 관상대의 예보다. 생각만 해도 숨이 가쁘고 미칠 것 만 같아진다. 『이게 도시 뭔가? 대 여름밤이라니! 온 세상이 미쳤단 말인가?』 이렇게 「드라이든」이 아니라도 외치고 싶을 만한 무슨 광란극들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제 「텔레비전·뉴스」시간에 비친 전국의 어느 바닷가나 모두 인파로 메워 있었다. 발을 들여놓을 틈도 없을 만한 물 속에서도 좋다고 웃음을 띠고 있는 어린이들의 표정은 그래도 마냥 행복스럽기만 해 보였다. 역시 물 속에서는 더위를 잊을 수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어린이와 함께 간 어른들도 더위를 잊을 수 있었을까? 더위는 바다 속에서나 그늘 없는 도심의 포도 위나 어쩌면 마찬가지일는지도 모른다. 그저 다르려니 하고 사람들이 느낄 뿐 일 것이다. 멸각심두화자량 이라는 말이 있다.
「벽암록」에 나오는 글이다. 당대 시인 두순학의 시에 나오는 구절이라고도 한다.
아무리 무더운 속이라도 구장에서 야구 응원에 열중하고 있을 때에는 더위를 잊는다.
더위는 실재한다. 수은주가 말해 주고 있다. 다만 그것을 고락 어느 쪽으로 삼느냐는 것은 자기에게 달려 있다. 그러니 마음먹기에 따라서 더위도 잊을 수 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무더위란 견딜 수 없이 더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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