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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커창 ‘성장 속 개혁’ 선택 … 장기 연착륙 가능할지 촉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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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이냐, 정체냐. 중국 경제는 지금 기로에 서 있다. 개혁개방 이후 연평균 10% 안팎에 달했던 성장률은 지난 2012년 2분기 이후 7%대(분기별 GDP 기준)에 머물러 있다. 그림자 금융, 부동산 과열, 빈부격차, 환경오염 등 고질적인 문제가 경제를 압박하면서 ‘하드랜딩(경착륙)’ 경보음도 들린다. 중국 경제는 과연 안녕할 것인가? 세계가 리커창(李克强) 총리의 지난 5일 전국인민대표대회(약칭 全人大·우리의 국회) 국정보고를 주목한 이유다.

리 총리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힘이 넘쳤다. “개혁은 올해 정부 업무의 가장 큰 임무다. 배수진을 치고 개혁의 일전(一戰)을 벌여야 한다. 시장에 제약을 주는 요소를 과감히 제거해 시장 자율을 높일 것이다….”

구체적인 개혁 정책을 풀어놓을 때는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올해 성장 목표 7.5%를 제시할 때는 박수 소리가 더 커지기도 했다. 리 총리는 취업을 위해 안정적 성장이 불가피하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리 총리의 이번 국정보고는 중국 경제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하나 던진 셈이다. ‘성장과 개혁을 동시에 이룰 수 있겠느냐’에 대한 것이다. 그는 “가능하다”고 했다. 7.5%의 다소 높은 성장목표를 제시했으면서도 경제 전반에 강도 높은 개혁을 단행할 것임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성장 속 시장 개혁’. 그게 이번 국정보고의 키워드다.

총리 보고 하자마자 터진 민간기업 디폴트
리 총리가 직면한 가장 큰 경제 현안은 역시 부채다. 성장에 타격을 입지 않으면서 부채의 악성 고리를 끊을 수 있느냐에 따라 ‘성장 속 개혁’의 성패가 결정된다. 현실은 녹록지 않아 보인다. 총리가 보고를 하던 바로 그 시간에 터져나온 상하이차오르(上海超日)의 회사채 채무불이행(디폴트)이 상징적이다. 이 회사는 그날 “8980만 위안(약 157억원)에 달하는 회사채 이자를 갚을 수 없게 됐다”며 채무불이행(디폴트)을 예고했다.

리 총리의 보고대로라면 시장 자율 원칙에 따라 부도 처리하면 그만이다. 손실은 투자자가 책임질 일이다. 그러나 생각만큼 간단치 않다. 오승렬 외국어대 교수는 “지금 부채 상황은 금융당국의 관리를 벗어나 움직이고 있는 그림자 금융으로 일촉즉발의 위기 수준”이라며 “작은 기업의 디폴트가 전체 금융권에 충격을 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쌓이고 쌓였던 부채가 임계치에 이르렀다는 얘기다.

리 총리는 과연 악성 부채에 매스를 댈 것인가? 역시 ‘안정 속 개혁’이라는 키워드에 답이 있다. BOA메릴린치의 중국 분석가인 데이비드 추이는 투자보고서에서 “상하이차오르와 같은 부도 뉴스가 앞으로 자주 등장할 것”이라며 “리 총리는 이를 통해 투자가들에게 ‘리스크(risk) 교육’을 시행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작은 업체를 시범적으로 퇴출시킴으로써 ‘국가(국유은행)가 막아주겠지’ 하는 모럴해저드를 불식시키려 한다는 설명이다. 그는 “그렇다 하더라도 개혁은 관리 가능 범위 내에서 이뤄질 것”이라며 “건설은행·공상은행 등 국유 은행이 버티고 있어 작은 디폴트가 금융 전체의 위기로 번질 가능성은 없다는 게 당국의 판단”이라고 말했다.

리커창 “성장·개혁은 충돌하지 않아”
‘성장과 개혁은 서로 충돌하는 게 아니라 보완·발전하는 것’이라는 게 리 총리의 개혁 철학이다. 이번 국정보고에 나온 “개혁은 최대의 보너스(改革是最大的紅利)”라는 말이 이를 대변한다. 허판(何帆) 중국사회과학원 세계경제정치연구소 부소장은 “중국의 경제개혁은 곧 국가의 힘을 빼고 민간의 자율성을 높여주는 과정이었다”며 “리 총리는 민영화를 통해 성장 동력을 찾았던 주룽지(朱鎔基) 시절의 정책을 닯았다”고 평가했다.

박상수 충북대 교수는 “리 총리가 이번 국정보고에서 가장 강조하고 싶어했던 게 바로 개혁”이라며 “올해는 지난해 11월 열린 18기 3중전회(중국공산당 제18기 중앙위원회 제3차 회의)에서 채택한 ‘전면적 개혁 결정’을 실행하는 개혁 원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행정 간소화(簡政放權)’와 ‘국유기업의 독점 타파’가 경제 개혁의 두 축이다. 리 총리는 보고를 통해 지난해 416건의 중앙정부(국무원)의 행정 규제를 철폐한 데 이어 올해 다시 200건을 없앨 것이라고 강조했다.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간섭을 가급적 줄여 시장의 자율을 확보하겠다는 뜻이다. 금융·에너지·철도·통신 등 국유기업 독점 산업에 민영기업 참여를 확대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박 교수는 “투자에 의존했던 성장에서 소비가 주축이 되는 성장, 해외시장보다는 내수시장을 통한 성장, 투입에 의존하기보다는 창신(創新)을 통한 성장을 이루겠다는 게 리커창 개혁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무리한 성장 버려야 세계 경제 도움”
리 총리가 ‘안정 속 개혁’을 통해 이루려는 거시경제의 모습은 ‘장기 소프트랜딩(연착륙)’이다. 허판 교수는 “투자와 수출로 이뤘던 10% 안팎의 고성장 시대는 다시 올 수도 없거니와 다시 와서도 안 된다”며 “리 총리는 경제 성장률이 2020년대 후반 5% 이하로 낮아질 수 있다고 보고 속도를 조절하고 있다”고 말했다. 큰 충격을 주지 않으면서 체질 개선을 이루는 데 정책의 초점이 맞춰질 것이라는 얘기다.

중국 연구로 이름 높은 스티븐 로치 예일대 교수는 “문제는 중국이 아닌 서방에 있다”고 말한다. 그는 최근 프로젝트 신디케이트 기고문을 통해 “중국이 무리한 성장 정책을 포기하고, 대신 체질 개선에 나서기로 했다”며 “이는 결국 세계경제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세계 각국은 그동안 중국의 부상에 여러 형태의 혜택을 누렸다. 한국·일본 등은 중국의 저임 노동력을 활용한 제조업을 키울 수 있었고, 호주·브라질 같은 자원 부국은 원자재 수출로 부를 늘렸다. 그런가 하면 미국·유럽 등은 중국산 저가 제품을 들여와 자국 물가안정을 이룰 수 있었다. 로치 교수는 “세계 경제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던 이 같은 ‘차이나 사이클’은 이미 거꾸로 작용하기 시작했다”며 “중국의 ‘장기 소프트랜딩’은 세계 경제의 패러다임을 바꿀 새로운 도전”이라고 분석했다. 중국의 저성장에 놀라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어떻게 대응할지를 고민해야 할 때라는 얘기다.

한우덕 중국연구소장
woodyh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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