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서소문 포럼

정도전, 후배 각료들에게 고함

중앙일보

입력 2014.03.10 00:52

업데이트 2014.03.10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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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정선구 기자 중앙일보 시사매거진제작담당
정선구
경제부장

내 이름은 정도전. 호를 삼봉(三峯)이라고 하지. 본관은 봉화요 고향은 영주인데, 호는 외갓집 단양의 도담삼봉에서 따왔다네. 요즘 KBS 드라마에서 나를 영웅 대접하고 있다지? 허허험. 기분은 좋네만은 향후 내 진면목을 어떻게 묘사할지 궁금하군. 과오도 많은데. 나에 대한 평가는 잘 알아. 급진적이고 과격하고. 또 요즘 관직으로 따지면 경제부총리·법무부 장관·국방부 장관·안전행정부 장관·교육부 장관을 한꺼번에 다 해먹고. 하지만 말야. 실록에 부정축재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지 않은가. 게다가 나를 죽인 이방원조차 내가 창안한 제도들을 계승했고. 왕이 돼서는 심지어 신하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지? “정도전에게 배운 진법을 계속 시키거라.” 물론 내가 만든 경복궁이 싫어 창덕궁을 새로 지어 거기서 살긴 했다지만.

 하루는 동북면 도선무순찰사(군무를 통할하는 임시 관직)로 있을 때였어. 이성계 왕이 나에게 편지를 보냈지. “봉화백, 헤어진 지 오래돼 그리운 생각 간절하오. 겨울옷 한 벌 보내니 바람과 이슬에 대비하오. 송헌거사.” ‘송헌’은 고려 말 석학 이색 선생이 왕에게 지어준 별호일세. 나를 ‘백’으로 높여주고 자신을 ‘거사’로 친근하게 칭했을 정도로 스스럼없는 신뢰관계가 형성됐지. 자, 나의 제1 원칙. 군주와의 관계정립을 제대로 하라. 여러분도 알다시피 내 별명은 해동장량. 한나라를 세운 것은 유방이 아니라 장량, 그만큼 나는 왕과 동반자라는 생각이지. 군주와 맞먹으라는 얘기가 아닐세. 게다가 지금 한국은 막강한 대통령제니까 맞먹으면 큰일나지. 자신감과 비전을 갖고, 자기를 신뢰하며 임명한 군주에게 믿음을 주어야만 한다는 말일세.

 나는 밑바닥부터 배웠네. 내가 권신들과 싸우다가 유배된 곳은 나주 근처 천민촌 거평부곡. 거기서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지. 더욱 놀란 것은 천민들이 백면서생들보다 더 지혜롭고 세상 이치를 더 꿰고 있었다는 사실일세. 자네들도 간간이 민심시찰 다니지만 시늉만 내는 건 아닌지. 백성이 진정 원하는 게 뭔지, 진정한 민본주의가 뭔지 제대로 파악하라는 게 제2 원칙일세. 이 점에서는 될성부른 사람을 백성 속으로 보내는 중국의 하방(下放)이 부럽구먼.

 이제 제일 강조하고 싶은 제3 원칙에 대해 말할까 하네. 얼마 전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이 발표됐다지? 3개년이라…. 물론 현오석 부총리는 “30년을 바라보고 3개년 계획을 설계했다”고 했지. 그러나 30년이 아니라 300년도 모자라는 일일세. 내가 만든 『조선경국전』은 훗날 경국대전의 모태가 돼 조선 오백년의 법 기틀이 됐지. 통치권은 백성을 위해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본사상을 담은 책 『경제문감』은 또 어떻고. 대대로 조선 경제의 근간이 되지 않았나. 요동정벌 운운하며 명나라 홍무제를 은근히 압박한 사실을 기억하는가. 힘이 있어야 외세에 흔들리지 않는다, 마냥 사대의 예로만은 안 된다, 뭐 이런 외교술은 지금의 외교안보팀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보네.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뒤 가진 궁궐 완공 축하연에서 내가 『시경(詩經)』에 나오는 구절을 따서 만든 이름 경복궁.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고 지은 사정전(思政殿). 부지런해야 한다며 붙인 근정전(勤政殿). 이 모든 게 지금에도 그대로 쓰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해프닝도 있었다며? 15개 과제가 9개로 축소되고, 300쪽 분량의 원안은 발표도 못했다며? 전·월세 대책도 얼마나 우왕좌왕했는가. 브리핑도 청와대 참모가 했다고 들었네. 이 무슨 망신인가. 청와대 참모는 참모일 뿐 정책기능은 자네들 몫 아닌가.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말했다지. SK 최태원 회장 판결로 기업투자 위축을 묻는 질문에 “회사는 시스템이 있다. 기업은 성장을 포기할 수 없고 시스템은 살아남아야 한다”고. 바로 그 점일세. 누가 대통령으로 선출되더라도, 누가 장관이 되더라도 국가는 잘 돌아가는 시스템. 바로 제3 원칙일세. 국민과 대통령의 신뢰 속에 심사숙고한 정책을 오래 지속시키는 시스템이 조선을 수천 수만 년 부강하게 만드는 일이네. 때론 나처럼 악역도 자처하시게. 당대의 평가가 두려운가. 걱정 마시게. 후대가 칭송해줄 테니.

정선구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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