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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영의 문화 트렌드] 인간을 고깃덩이처럼 그린 작품, 로보캅 메시지와 상통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65호 24면

“인간이 털코트 입은 하이에나들에 의해 정육점에 걸려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곤 한다.”

프랜시스 베이컨 그림의 인기

인간을 일그러진 고깃덩어리처럼 표현한 그림들로 유명한 영국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1909~92)의 말이다. 최근 호세 파딜라 감독의 2014년 리메이크 버전 ‘로보캅’을 보다가 영화 장면에 등장하는 베이컨의 그림(사진)을 보는 순간 이 말이 떠올랐다.

그 그림은 베이컨 특유의 스타일로 뭉개지고 해체된 인간의 육체가 세 개의 화폭에 그려져 있는 것이었다. 세 폭의 그림이 한 세트를 이루는 트립티크(triptych)는 베이컨이 즐겨 취한 형식이다. 지난해 말 뉴욕 경매에서 우리 돈으로 1500억원이 넘는 가격에 팔려 미술경매 사상 최고가를 기록한 ‘루치안 프로이트에 대한 세 가지 연구’ 역시 트립티크였다.

주로 중세 르네상스 시대 성당 제단화가 트립티크 형식이었는데, 그것과 관련이 있을까? 베이컨은 특별히 종교적인 의미는 없으며, 다만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정육점의 고기-그 무참히 살해되어 매달린 동물의 육체-가 십자가형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트립티크 형식을 종종 쓴다고 말했다.

영화 ‘로보캅’(2014)의 한 장면.

종교적 의미는 없다지만 ‘로보캅’ 속 베이컨의 그림은 그 트립티크 형식 때문에 종교적인 숭엄한 분위기를 지닌다. 외적·내적 폭력으로 고통 받는 인간과 다른 생명체에 대한 경건한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은 ‘로보캅’의 주인공 알렉스 머피(조엘 키너먼)에 대한 연민으로 이어진다.

폭탄 테러를 당해 거의 사망에 이르렀던 경찰 머피는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기계 몸을 지닌 로보캅으로 재탄생한 후 극심한 혼란에 빠진다. 그가 로보캅 슈트에서 꺼내달라고 외치자 담당 과학자 데넷 노튼(게리 올드먼)은 슈트를 해체해서 그 안에 있는 머피의 몸을 보여준다. 남아 있는 육신이라고는 머리와 심장을 감싼 선홍색 폐, 그리고 오른손뿐. 머피는 공포와 절망으로 비명을 지르다가 차라리 죽여 달라고 말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이고도 슬픈 장면이다. 머피의 해체된 몸은 시각적으로 영화 속 베이컨의 그림과 절묘하게 연결된다.

게다가 이 그림의 제목이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로부터 영감 받은 트립티크’인 것도 의미심장하다. 머피는 고대 그리스 비극 ‘오레스테이아’ 3부작의 주인공처럼 운명의 덫에 걸려 자유의지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존재라 할 수 있으니까.

머피는 노튼의 설득으로 결국 로보캅으로 활동하기로 하지만 곧 자유의지를 심각하게 침해당한다. 로보캅이 전투 시에 인간으로서 판단을 하기 때문에 순수 로봇보다 반응 속도가 느리다는 지적이 나오자 로보캅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옴니코프는 전투 시에 로보캅의 기계 몸이 알아서 반응을 하도록, 그러나 머피의 머리는 그게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으로 착각하도록 그의 뇌에 조작을 가한다.

옴니코프의 CEO 레이먼드 셀라스(마이클 키튼)가 사무실에서 이런 결정을 내릴 때 그의 등뒤에 베이컨의 트립티크가 걸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로보캅 머피는, 베이컨식으로 말하자면, 대기업이라는 하이에나에 의해 정육점에 고기 신세로 매달린 인간인 셈이다.

‘로보캅’의 프로덕션 디자이너인 마틴 위스트는 파딜라 감독의 제안에 따라 베이컨 그림들을 참고해 디자인 작업을 했으며, 특히 노튼 박사의 연구소 디자인이 “베이컨 그림의 3D 버전”이라고 했다. 즉 매우 간결하고 직선적인 연구소 한가운데 머피가 로보캅 슈트에 갇힌 채 슈트에 연결된 기계에 매달려 서 있는데, 그 모습은 베이컨 그림에서 기하학적 틀 안에 갇혀 고깃덩어리처럼 매달려 있는 인간과 같다는 것이다.

‘로보캅’에서 제기하는 인간과 기계의 차이에 대한 질문, 인간 존엄성과 자유의지의 문제는 가까운 미래에 현실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인공지능과 로봇이 아니더라도 인간 존엄성과 자유의지가 짓밟힐 위험, 그래서 인간이 한낱 고깃덩어리 신세가 될 위험은 늘 존재해 왔다. 그 때문에 베이컨의 무시무시하고 고통에 찬 그림이 그토록 인기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난달에도 그의 작품 하나가 런던 경매에서 유럽 경매 사상 최고가에 팔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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