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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의 자연사 이야기] 암컷·수컷 외 다른 성 존재한다면 생명체는 사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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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호 25면

영화 ‘니모를 찾아서’에 등장하는 흰동가리 말린과 니모는 부자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과학적으로 말하면 말린과 니모는 아빠와 아들이 아니라 아내와 남편 사이로 지내게 된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면서 부모들은 온갖 걱정을 한다. 이런 모습을 보면 2003년 월트디즈니와 픽사가 공동 제작한 영화 ‘니모를 찾아서’가 떠오른다. 아내 없이 혼자 아들 니모를 키우던 흰동가리 말린에게도 마침내 그날이 왔다. 개구쟁이 니모가 안전한 산호초 숲을 벗어나 학교에 가게 됐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니모는 보트를 구경하다가 인간에게 사로잡히고 만다. 하지만 용감한 아빠 말린은 결국 니모를 구출하고 행복하게 산다는 얘기다.

<6> 종족 보존의 비밀

이 영화엔 과학적인 오류가 있다. 말린과 니모는 결코 부자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보통 흰동가리는 큰 암컷 한 마리와 작은 수컷 한 마리, 그리고 어린 흰동가리 몇 마리가 가족을 이룬다. 그러다가 암컷이 죽으면 수컷은 엄마로 변신하고 새끼 가운데 가장 큰 놈이 아빠가 된다. 따라서 말린과 니모는 아빠와 아들이 아니라 아내와 남편으로 행복하게 살았다고 해야 맞다.

현재 지구의 자연은 성(性)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 남녀가 화음을 맞춰 부르는 노랫소리는커녕 개구리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화려한 날개를 자랑하는 공작도 볼 수 없고, 울긋불긋 온갖 자태를 뽐내는 꽃과 그 주변을 노닐며 희롱하는 벌과 나비도 존재하지 않는다. 성이 없다면 사랑과 환희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생명이 있는 곳에서 사랑을 빼놓을 수 있을까? 있다. 지구 역사 46억 년의 대부분은 성이 없는 음침한 세상이었다. 불과 10억 년 전까지만 해도 지구는 오직 자기복제를 하는 생명체로 가득한 조용한 행성에 불과했다. 지금도 지구에 살고 있는 절대 다수의 생명체들은 성 없이 자기복제를 통해 번식한다. 박테리아(세균)가 그 주인공이다.

무성생식, 안정된 유전자 조합 유지 장점
박테리아가 지금도 여전히 무성(無性)생식을 하는 것은 이득이 있기 때문이다. 무성생식은 효율적이면서도 거의 모든 문제를 회피할 수 있는 방법이다. 사람도 짝을 만나고 데이트하고 가정을 이루는 데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는가? 공작은 생존의 위험을 무릅쓰고 꼬리를 화려하게 꾸며야 하고 극락조들은 암컷에 구애하기 위해 온갖 ‘생쇼’를 벌인다.

무성생식을 하면 안정화된 유전자 조합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 낫 모양 적혈구빈혈증을 예로 들 수 있다. 원래 적혈구는 원반 모양이다. 그런데 나쁜 유전자는 적혈구를 낫 모양으로 바꾼다. 낫 모양 적혈구는 모세혈관을 통과하지 못하므로 신체 곳곳에 산소가 공급되지 않아 결국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죽게 된다. 그렇다면 당연히 진화 과정에서 나쁜 유전자는 제거됐을 텐데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은 분명히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낫 모양 적혈구에선 말라리아 기생충이 살 수 없다.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곳을 상상해 보자. 정상 적혈구만 지닌 사람은 말라리아에 걸려 쉽게 죽는다. 낫 모양 적혈구만 가진 사람은 심한 빈혈로 숨진다. 정상 적혈구를 만드는 유전자(A)와 낫 모양 적혈구를 만드는 유전자(a)를 각각 하나씩 갖고 있는 사람(Aa)은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고 빈혈도 생기지 않는다.

Aa라는 안정된 유전자를 가진 두 사람이 짝을 이루면 자식은 AA·Aa·Aa·aa가 될 것이다. 네 명의 자식 가운데 둘은 목숨을 잃게 된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자기복제를 한다면 영원히 Aa라는 안전한 유전자를 지닌 자손만 얻는다. 이와 같이 무성생식은 아주 효율적이고도 안전한 생식법이다. 모든 생명체가 다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 문제다.

최초의 생명체는 단 한 개의 막으로 이뤄진 박테리아였다. 박테리아는 자기복제라는 무성생식을 통해 번식한다. 그런데 어느 시기부터 박테리아들이 공생(共生)을 시작했다.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처럼 자신만의 유전자를 가진 작은 박테리아들이 큰 박테리아 안에 들어와서 함께 살았다. 그러면서 유전자는 핵(核)이라는 독립적인 주머니로 둘러싸였다. 진핵(眞核)생물이 된 것이다.

현재 모든 진핵생물은 유성(有性)생식을 한다. 어떻게 무성생식을 하는 박테리아의 공생으로 탄생한 진핵생물은 유성생식을 하게 됐을까?

최초의 진핵생물은 박테리아처럼 무성생식을 했다. 이 가운데 일부가 유성생식을 터득하게 됐다. 나머지는 무성생식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때 박테리아에겐 없는 어떤 장애물이 진핵생물 앞에 등장했다. 진핵생물 가운데 유성생식을 선택한 집단만이 이 장애물을 넘을 수 있었다. 무성생식을 하는 진핵생물은 모두 멸종했다.

진핵생물이 맞닥뜨렸던 장애물은 무엇일까? 바로 공생이다. 특히 세포 안에서 ‘발전소’ 역할을 하는 미토콘드리아와의 공생은 진핵생물을 등장시킨 핵심적 사건이다. 그런데 큰 숙주 세포 안에 자리 잡고 사는 미토콘드리아는 죽을 때마다 자신의 유전자를 방출했다. 이 유전자는 숙주의 염색체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면서 숙주의 유전자를 갈기갈기 쪼개놓았다. 결국 고리 모양이었던 숙주의 염색체는 막대 모양으로 변하고 말았으며 엄청난 돌연변이를 일으켰다. 어떤 돌연변이는 세포벽을 없앴고, 또 어떤 돌연변이는 박테리아에게서 물려받은 세포 골격을 잃어버리게 했다. 돌연변이는 대부분 해롭다. 돌연변이가 1000번이 일어난다면 이득이 되는 돌연변이는 채 한 번도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진핵생물 앞에 놓였던 장애물이다.

유성생식은 최고의 조합을 선택했다. 수컷의 배우자인 정자는 작지만 운동성이 있고 암컷의 배우자 난자는 운동성은 없지만 양분(養分)과 세포 소(小)기관을 갖고 있다.

무성생식 진핵생물은 모두 멸종
대부분의 옛 진핵생물들이 이 장애물을 넘지 못하는 동안 일부 진핵생물은 유성생식을 통해 한 세포에게선 정상적인 세포막을 물려받고, 다른 세포에게선 정상적인 단백질 합성 메커니즘을 물려받으면서 생존 가능한 조건을 갖춰 나갔다. 1000개의 개체 가운데 단 하나만이 이 과정을 뛰어넘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유성생식은 진핵생물을 멸종 위기에서 구원했다. 결국 모든 진핵생물은 유성생식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성(性)은 한 생명체 안에서 최고의 유전자 조합을 만들어 해로운 돌연변이를 제거하고 혁신적인 특성을 한데 합치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이다.

유성생식을 하려면 암컷과 수컷이란 두 가지 성이 필요하다. 무엇이 암컷이고 무엇이 수컷일까? 생식기의 모습이 아니라 배우자로 구분된다. 정자를 내보내면 수컷이고 난자를 내보내면 암컷이다. 작지만 운동성이 있는 배우자를 정자라 하고, 운동성은 없지만 큰 배우자를 난자라 부른다. 애당초 유성생식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했을 것이다. 첫째는 정자와 정자가 만나는 것이다. 이 경우 두 배우자가 만날 확률은 높지만 수정해 봐야 양분(養分)이 부족해 제대로 성장할 수 없다. 둘째는 난자와 난자가 만나는 것이다. 수정만 된다면 무럭무럭 자랄 수 있겠지만 둘 다 운동성이 없으므로 애당초 수정될 가능성이 없다. 결국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셋째 경우만 남는다. 운동성 있는 정자가 양분을 충분히 가진 난자를 찾아가는 것이다.

만약 성이 암컷과 수컷 단 두 가지가 아니라 서너 가지쯤 되면 어땠을까? 생명의 다양성은 더 커지지 않았을까? 왜 진화는 이런 방식을 택하지 않았을까?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진화생물학자 로런스 허스트는 “유전체(지놈) 사이의 분쟁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분쟁의 근원은 공생이다. 세포 안엔 핵 염색체와 미토콘드리아 염색체가 있다. 핵 염색체는 정자와 난자가 절반씩 제공한다. 문제는 미토콘드리아 염색체다. 암컷과 수컷 가운데 누가 미토콘드리아 염색체를 제공할 것인가? 생명은 암컷 배우자인 난자가 미토콘드리아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우리가 아버지보다 어머니에게서 더 많은 유전자를 물려받는 것은 이래서다.

그런데 만약 성(性)이 세 가지였다면 어땠을까? A, B, C라는 세 가지 배우자 가운데 A에게만 미토콘드리아가 있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미토콘드리아가 없는 B와 C 수정란은 생존하지 못할 것이다. 세 가지 성 가운데 두 가지 성에 미토콘드리아가 있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만약 두 가지 이상의 성이 있다면 유전자 사이의 치열한 생존경쟁 때문에 타협점을 찾을 수 없다. 설사 세 가지 이상의 성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사멸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래서 생명계엔 두 가지 성을 가진 생명체만 진화하게 된 것이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이유가 제각각이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말하려는 것은 결혼 생활이 행복해지려면 수많은 요소들이 성공적으로 조합돼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껴야 하고 돈·자녀·종교·인척 등 중요한 문제에서 합의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중 어느 한 가지라도 어긋나면 나머지 요소들이 모두 성립하더라도 결혼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생명 지속되는 건 섹스가 재미있기 때문
그렇다면 왜 이리도 힘든 성을 생명은 유지해야 할까? 영국의 생화학자 닉 레인은 『생명의 도약』에서 성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만약 섹스가 어쩔 수 없이 저지르게 되는 어리석은 행위, 곧 실존적 부조리라면, 섹스를 하지 않는 것은 더 나쁘다. 대부분의 경우가 비(非)실존적 부조리, 다시 말해 멸종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섹스엔 이런 부조리를 능가하는 압도적인 큰 장점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성의 압도적인 장점에 대해선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누구나 동의하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성이 없었다면 크고 복잡한 형태의 생명체는 출현이 불가능했다는 사실이다. 성이 탄생하지 않았다면 우리 인류도 없다. 성은 결코 쉽게 탄생하지 않았다. 38억 년 전 지구에 최초의 생명체가 생긴 뒤 성이 탄생하기까지는 무려 28억 년이라는 지난한 세월이 지나야 했다.

생명의 기본 역할은 후손을 남겨 종(種)을 지속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지 일부러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나는 인류 종 번식이란 역사적 사명을 띠고 섹스를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하다 보니 자식이 생겼다. 그렇다면 뇌는 어떻게 해서 동물들로 하여금 섹스를 하게 할까? 『총, 균, 쇠』의 저자인 미국 UCLA 지리학과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섹스의 진화』에서 ‘섹스는 재미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재미를 통해 생명의 지속성을 유지하게 하니 진화는 참으로 오묘하지 아니한가!



이정모 연세대 생화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독일 본 대학에서 공부했으나 박사는 아니다. 안양대 교양학부 교수 역임. 『달력과 권력』 『바이블 사이언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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