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차(茶)와 사람] 고려 땐 왕이 몸소 차 준비 … 최승로, 시무 28조서 폐단 지적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65호 26면

한국을 대표하는 불보승찰(佛寶僧刹)인 경남 양산의 통도사. 이 사찰에서 옛 고승들은 차를 마시며 수행했다. 스님들이 부처님 진신사리탑 주변을 돌며 참배하고 있다. [중앙포토]

경남 양산의 통도사. 한국을 대표하는 불보승찰(佛寶僧刹)이다. 그곳에서 옛 고승들이 차를 마시며 수행했다는 걸 후세 사람들은 잘 모른다.

<4> 차향에 취한 고려

“절터는 사방 둘레가 4만7000여 보(步:단위) 정도이다. 각각 탑과 장생표(長生標:경계를 나타내는 표지물)가 모두 12개이다… 앞의 사방 장생표 안에 동쪽으로 조일방이 있고, 서쪽으로 자장방과 월명방이 있다. 남쪽으로 적운방과 호응방이 있고, 북쪽으로 백운방과 곡성방이 있다. 모두 통도사에 속한 암자들이다… 북쪽 동을산(冬乙山)의 다소촌(茶所村·다촌)은 차를 만들어 절에 바치던 장소이다. 절에 바치던(차를 만들던) 차밭과 다천(茶泉)은 지금도 오히려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다. 후인들은 (이곳을) 다소촌이라 여겼다.”『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通道寺舍利袈娑事蹟略錄)』

그 다촌의 흔적을 지금 찾을 길은 없다. 그러나 고려시대까지 통도사에는 다촌이 있었다. 구한말 역사학자 호암 문일평은 『다고사(茶故事)』에서 다촌의 형성 시기를 ‘고려 정종(靖宗)께’로 잡았다. 통도사 다촌은 지금의 울산 언양군인데 그렇게 보는 근거가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에 있다. ‘북쪽의 다촌은 평교이니 곧 거화군의 경계이다(北茶村坪郊乃居火郡之境也)’라는 기록은 거화군(居火郡)은 언양(彦陽)임을 보여준다. 통도사의 다원은 11세기 무렵에 형성됐고 관리자는 통도사 승려였음을 밝히는 이 기록은 사찰이 차 문화의 중심지였음을 잘 드러낸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후삼국의 호족 세력이 건국한 고려시대는 차 문화의 꽃을 피웠다.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남기며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를 중시하라 했는데, 왕실이 주관하는 이들 의례에는 차를 공양했다. 그게 민가에도 흘러가 제사에 차를 올리는 풍속이 생겼다. 다례 혹은 차례(茶禮)라는 말은 여기서 비롯됐다.

귀족 중심 차 문화 불교계가 허물어
기록상으론 태조 14년(931), 군민(軍民)과 승려에게 처음 하사됐다. 이후 고려 초기 5품에서 9품 이상 관리와 관료 중에 80세 어머니와 처를 둔 자에게 차가 하사됐다. 이로 인해 음다층은 확산되었지만 여전히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차 문화의 중심은 여전히 왕실 귀족층과 승려, 관료, 문인이었다. 차나무가 추운 곳에선 자라지 않고, 차가 왕의 하사품으로 권위를 상징한 것도 차 문화가 귀족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벽을 불교계가 허물었다. 사상계를 주도했던 불교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승려와 교류했던 문인들에게도 차가 스며들어갔다. 왕실 후원으로 경제가 탄탄해진 사원은 귀품 차를 만들 수 있었다. 귀한 차를 즐기고, 차와 물을 품평하는 능력이 뛰어났던 승려들은 절을 찾는 문인들과 시를 짓고, 차를 품평했다. 그런 자리가 거듭되면서 격조 있는 모임으로 정착된다. 당시 문인들의 시에는 승려들과 차를 즐기며 시를 짓던 아름다운 정경을 묘사한 시가 자주 등장한다. 이규보(1168~1241)의 ‘화숙덕연(和宿德淵)’이 이런 정황을 잘 그려냈다.

잔잔한 호수, 파란 물결 넘실거리고
(碧湖晴瀲灩)
여린 풀이 아득히 우거졌네
(芳草遠芊綿)
삼천리 곳곳에서 길을 물으니
(問路三千里)
이름이 알려진 지 이미 사십 년
(知名四十年)
서늘함이 좋아 난간에 기댔고
(愛凉憑水檻)
먼 곳을 보려고 높은 봉우리에 오르네
(眺遠上雲巓)
늙은 승려 일도 많구나
(老衲渾多事)
차를 평하다가 다시 샘물을 평가하려니
(評茶復品泉)
(『동국이상국전집』 권 7)

그런 귀품 차를 어느 사찰에서 누가 만들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는 위에서 언급한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이다. 이 귀중한 기록을 통해 다소(茶所)가 설치됐음을 알 수 있고, 이로써 당시 차의 전문가는 승려였으며 수행생활에 필요한 차를 자급자족하는 것이 선종 사찰의 전통이란 점을 유추할 수 있다. 그래서 다촌은 사원을 중심으로 형성됐을 것이다.

고려 색채 띤 차, 왕실 후원으로 생산
차 씨는 9세기 유입됐다. 왕실용 차를 생산하는 어차원(御茶園:왕실용 차를 만드는 곳)은 이미 10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급화와 고려다운 색채를 띤 차품의 생산은 왕실의 후원으로 사원의 공소(工所)에서 이뤄졌다. 고려의 차품이 완성된 시기는 대략 10세기 말께다. 『고려사절요』가 이를 보여준다.

“성종 8년(989) 5월, 시중(侍中) 벼슬하던 최승로가 죽었다… (최승로가) 누차 표를 올려 사직을 요청했지만 그럴 때마다 (왕은)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989년)에 이르러 병으로 죽으니 나이 63세이다. 왕이 슬퍼하여 교서를 내려 그의 공훈과 덕행을 표창하고, 태사로 추증했다. 부의(賻儀)로 베 1000필과 밀가루 300석, 갱미(粳米) 500백, 유향(乳香) 100냥, 뇌원차(腦原茶) 200각(角), 대차(大茶) 10근(斤)을 내렸다.”『고려사절요』권 2, ‘성종문의대왕(成宗文懿大王)’

이때 하사된 차는 고려에서 생산된 토산차다. 뇌원차는 단차(團茶:잎을 쪄서 찧은 뒤 틀에 넣어 모양을 만든 뒤 굳힌 차)이고, 대차는 산차(散茶:잎차)로 짐작된다. 각(角)이나 근(斤)은 당시 차의 단위. 차종에 따라 달리 쓰였다. 그렇다면 각과 근은 어떤 차를 표시한 것일까. 9세기 일본 승려 엔닌(圓仁)이 쓴 『입당구법순예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답이 있다.

도당(渡唐) 구법승인 엔닌은 순례기에 차의 단위를 근(斤)과 곶(串)으로 기록해 두었는데, 산차 종류인 세차(細茶)나 몽정차(蒙頂茶)는 근으로, 단차는 곶(串:꿰미)으로 기록했다. 곶(串)과 각(角)은 모두 단차의 단위다. 그래서 10세기 말 성종이 하사한, 각으로 표시한 뇌원차는 단차이고, 근을 사용한 대차는 산차임을 알 수 있다.

고려 시대에는 중국처럼 단차와 산차를 모두 만들었다. 뇌원차와 대차는 주로 공신들에게 하사된 귀한 차였다. 정종 4년(1038) 거란에서 돌아온 김원충(金元沖)에게 뇌원차와 대차를 내렸다. 이 밖에도 고려에서는 유차(孺茶:어린 차 잎으로 만든 귀한 차), 선차(仙茶:차의 이름), 조명(早茗:어린 차 잎으로 만든 차) 같은 귀품의 차가 생산되었다.

실제 명품 차가 완성된 시기는 대략 11세기 이후이며 고려 차품과 다구의 격조는 송나라와 견줄 만했다. 강경숙 전 충북대 교수는 청자 다완의 질적 완성미와 예술미는 11세기에 절정에 올랐다고 하니 차품도 이때 완성됐다고 본다. 아름다운 다완의 출현은 고귀한 차를 담기 위한 것이었다. 차품이 완성되면서 다완의 예술미도 완결된 것이다.

고려 성종 원년(982) 왕명으로 최승로가 올린 ‘시무책’ 28조 가운데 2조. 왕이 몸소 차를 준비하는 폐단을 지적한다.

“국사 중시해야 할 왕이 차 갈아서야…”
얘기가 돌아가지만 최승로(927~989)는 차와 관련이 깊었다. 최승로는 성종 원년(982) 왕명으로 ‘시무책’ 28조를 올린다. 이상적 국가론을 담은 상소문은 지방 호족의 힘이 조정의 힘을 해칠 수 있으니 이를 혁파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왕이 몸소 차를 준비하는 폐단도 아울러 지적했다.

“전하께서는 공덕재를 베풀고, 혹은 몸소 차를 갈고, 맥차를 연마한다고 하시는데, 저의 우매한 생각에는 전하의 몸이 피로해질까 염려됩니다(竊聞 聖上爲設功德齋 或親? 茶 或親磨麥 臣愚深惜聖體之勤勞也).”

‘시무책’ 28조 가운데 2조에서 언급된 내용이다. 공덕재는 불교의 공덕신앙에서 비롯됐다. 공덕을 쌓기 위해 승려들에게 식사를 공양하는 법회였다. 최승로는 “폐단이 광종에게서 시작됐다”면서 “항상 백성의 기름과 피를 짜내어 재를 베푸니 부처의 신령함이 있다면 어찌 즐거이 공양에 응하겠습니까”라고 나무랐다. 그러면서 “그런 공덕재에서 몸소 차를 갈고(연차), 맥차를 가는 것(마맥)은 국사를 중시해야 할 왕의 일이 아니다”라 했다.

여기 작지만 연구자들의 의견이 갈리는 문제가 있다. 연차(碾茶)나 마맥(磨麥) 모두 차를 갈아 가루로 만드는 일인데, 최승로는 왜 굳이 차(茶)와 맥(麥)으로 구분했을까. 지금까지는 대개 글자의 뜻을 따라 ‘차를 갈고, 보리를 갈다’로 해석했다.

하지만 10세기 말, 고려산 차는 단차와 산차였다. 게다가 당시는 제다술도 뛰어났다. 그런데도 보리를 갈아 올렸다는 것은 제다 변천사를 고려할 때 의문이다. 보리를 갈아 차 가루와 함께 음용한 사례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당말오대(唐末五代)의 시인 모문석(毛文錫)의 『다보(茶譜)』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10세기께 저술된 『다보』에는 ‘촉주의 진원·동구·횡원·미강·청성에서 차가 난다. 횡원에서는 작설·조자·맥과가 생산되는데, 대개 어린 차 싹을 따서 만든 것(蜀州晉原, 洞口橫源 味江, 靑城. 其橫源 雀舌 鳥觜, 麥顆. 蓋取其嫩芽所造)’이란 기록이 있다. 오대에 맥과(麥顆)라는 명차가 있었으므로 맥(麥)은 차의 이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맥은 이른 봄 보리쌀처럼 어린 차의 싹을 따서 만든 귀품 차를 가리킨 것이다. 최승로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그의 말은 고려 초기 왕실 의례에서 차가 얼마나 귀한 공양물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박동춘 철학 박사,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소장, 문화융성위원회 전문위원. 저서론 『초의선사의 차문화 연구』 『맑은차 적멸을 깨우네』 『우리시대 동다송』이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