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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부실대학 이사장의 한숨 "퇴로 열어주면 문 닫을 텐데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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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경북 안동시 임하면 ‘김재규 학원’ 수강생들이 6일 점심 식사를 위해 구내식당으로 향하고 있다. 이곳은 지난해 2월까지 4년제 건동대가 있던 자리다. 재정지원제한대학으로 지정돼 어려움을 겪던 대학 법인이 자진 폐교한 뒤 경찰공무원시험 기숙학원을 유치했다. 법인 관계자는 “대학 스스로 문을 닫으려 해도 난제가 수두룩하더라”고 말했다. [프리랜서 공정식]

지난달 25일 경북 경산의 한 전문대. 논과 산으로 둘러싸인 학교의 정문 앞에는 가게가 수퍼마켓·칼국수집·중국음식점 세 곳뿐이다. 방학이라지만 교정에서 학생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학교 밖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재학생 김모(간호학과 3)씨는 “부실대학인 줄은 알았지만 취업률이 높은 학과라 들어왔다”며 “실습하러 왔다가 학생이 별로 없어 돌아가는 길인데 개강해도 썰렁하기는 마찬가지”라고 전했다. 이 대학은 2010년부터 4년간 내리 학자금대출제한 대학으로 지정됐다. 2008년 대학 법인을 인수한 김모(67) 이사장은 “대학에서 손을 뗀 뒤 규제가 없는 러시아 하산에서 학교를 운영할 생각”이라며 “하지만 재단이 투자한 돈을 전혀 돌려받을 수 없어 고민”이라고 말했다. 그는 “말만 안 할 뿐 대학을 접고 싶어 하는 법인이 많다”며 “퇴로를 막아놓으니 운영이 곤란한 지경이 돼도 문을 닫지 못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2018년부터 고교 졸업자가 급격히 줄어 대학 구조조정이 시급한 가운데 부실대학이 스스로 문 닫게 하려면 사립대에 퇴출 통로를 열어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다. 지난해 기준으로 대학(전문대 등 포함)이 433곳에 달하지만 지금까지 폐쇄된 대학은 11곳뿐이다. 이 중 자진 폐쇄한 곳은 건동대·경북외대 등 네 곳이다. 교육부 대학구조개혁위원장을 지낸 홍승용 덕성여대 총장은 “감사에 적발돼 폐쇄 명령을 받는 대학이 일부 있지만 절차나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 자율적으로 그만둘 수 있게 퇴로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2012년 폐쇄된 명신대와 성화대 법인은 아직도 교육부와 소송 중이다. 최용섭 광주보건대 부총장은 “사립대를 설립할 때 개인 재산으로 요건을 맞췄는데 그만둘 때는 한 푼도 안 주니 부실대 오너들이 끝까지 버티는 것”이라며 “소속 학생에게도 피해가 가므로 재산의 일부를 설립자 측에 보상해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현행 사립학교법은 대학이 청산하고 남는 재산을 다른 학교 법인 등에 넘기거나 국고에 귀속하도록 하고 있다.

 본지가 정부 재정지원제한대학으로 지정된 적이 있는 사립대(전문대 포함) 법인 10곳을 조사한 결과 러시아행(行)을 검토 중인 법인을 제외한 9곳 모두 “퇴로가 마련되지 않으면 대학 운영이 어려워져도 스스로 접지는 않겠다”고 밝혔다. 전남 K전문대 이사장은 “쥐를 쫓아도 구멍을 열어놓는데 사립대엔 퇴로를 막아놓고 부실대로 낙인 찍는다”며 “재정 지원이 끊기고 학생 감소로 등록금 수입이 적어져도 퇴로를 열어주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겠다”고 말했다. 설립자의 아들인 경기도 S전문대 총장도 “해산 때 재산이 국고로 귀속된다면 끝까지 버틸 수밖에 없지 않으냐”며 “처음 투자한 만큼이라도 환원해줘야 문 닫는 학교가 나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문대법인협의회 천세훈 총무부장은 “퇴출 시 재산평가액의 30%까지 설립자 등에게 돌려주자는 입장”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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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로 터주는 법안 번번이 무산=과거 정부도 원활한 대학 구조개혁을 위해 사립대의 퇴로를 열어주는 방안을 추진했었다. 하지만 번번이 반대 여론에 막혀 법제화하지 못했다.

 노무현 정부는 2005년 사립대 잔여재산을 공익법인에 넘길 수 있도록 한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으나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비리재단에 악용될 수 있다”고 반대해 무산됐다. 이명박 정부도 잔여재산을 공익·사회법인에 넘기거나 새 공익법인 설립에 활용하는 법안을 내놨지만 폐기됐다. 2012년 새누리당 민병주 의원이 생계 곤란 출연자에게 생계비·의료비·장례비를 지급하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지만 1년 반 이상 상임위 소위에 계류 중이다.

 교육부는 사립대 법인 해산 시 잔여재산 귀속 특례 조항을 담은 법안을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장학재단·복지법인 등으로 전환을 허용하고 생계 곤란 설립자 등을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송영식 한국대학법인협의회 사무총장은 “1998년부터 2006년까지 사립 중·고교에 대해선 해산 시 재산평가액의 30%까지 법인 측에 해산장려금으로 지급하는 특례를 적용했다”며 “특별법을 제정하거나 사립학교법을 개정해 설립자나 재산 출연자, 기부자에게 재산 일부를 환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대 여론도 만만찮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민주당 김태년 의원은 “사립대 상당수가 등록금으로 학교 시설을 늘려 왔다”며 설립자 측에 재산을 돌려주는 데 반대했다. 안진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대학 설립 순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것”이라며 “설립자는 그에 상응하는 명예와 부를 누린 만큼 공익법인은 몰라도 개인에게 보상하는 것은 특혜”라고 말했다. 한 전문대 총장은 “대학 구조조정이 시급한 만큼 비리 재단이 아니라면 재산을 어느 정도라도 돌려주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며 “반대하는 측에서도 다른 대안을 내놓긴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김성탁·천인성·윤석만 기자, 경산=김기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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