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전 후반 10분, 손흥민(22·레버쿠젠)의 발에서 불꽃이 번쩍 일었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29·레알 마드리드)를 연상케 했다.
김신욱(26·울산)이 헤딩으로 내준 공을 구자철(25·마인츠)이 잡는 순간, 손흥민은 수비수 뒤 공간을 향해 맹렬히 달렸다. 구자철의 전진패스가 다소 길어 골키퍼와 거리가 가까워진 상황. 손흥민은 머뭇거리지 않고 왼 발등에 공을 얹어 대포알 같은 슛을 날렸다. 슈팅은 골키퍼가 손 써볼 틈 없이 크로스바를 맞고 골네트로 빨려 들어갔다. 골을 넣은 손흥민은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댄 뒤 두 손바닥을 밑으로 향해 내리누르는 골 세리머니를 했다.
손흥민의 우상 호날두가 자주 하는 세리머니다. 호날두는 동료에게 골에 흥분하지 말고 침착해지라는 의미에서 이 같은 세리머니를 한다. 손흥민은 세계 최고를 자부하는 호날두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까지 재현했다. 손흥민은 자신의 방에 호날두의 사진을 붙여놓고, 호날두의 하이라이트 동영상을 보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할 정도로 뼛속까지 호날두 팬이다.
손흥민이 탈아시아급 선수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활약이었다. 대표팀에서 유럽팀을 상대로 첫 골을 신고한 점이 고무적이다. 그동안 손흥민은 인도·카타르·아이티·말리 등 약체를 상대로 A매치 골을 뽑아냈다. 손흥민은 전반 18분에는 감각적인 로빙 패스로 박주영의 골을 어시스트했다. ‘팀 플레이가 약하다’는 이유로 손흥민에게 냉정한 시선을 보냈던 홍명보 대표팀 감독도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경기 후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에서 만난 손흥민은 “팀이 좋은 모습을 보여 공격수로서 수월하게 경기했다. 원정에서 좋은 경기를 해 상당히 뿌듯하고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이어 “주영이 형이 오랜만에 합류해 멋있는 골을 넣는 것에 도움을 주게 돼 기분 좋다”고 했다.
손흥민은 골 욕심뿐만 아니라 동료들을 살리는 데도 치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홍 감독님 밑에서 경기를 하다 보니 욕심을 줄이고 슈팅 때릴 상황에서도 한 번 더 생각해 패스를 하게 된다. 내 욕심만 부릴 게 아니라 팀에 녹아들어 뛰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테네(그리스)=오명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