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역사NIE] 안중근의 이토 처단이 테러 아닌 의거인 이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6면

올 1월 19일 중국 하얼빈에 ‘안중근 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개관하자마자 많은 관람객이 다녀가는 등 열기가 뜨겁다. 중국인이 안 의사(義士)에게 열광하는 이유가 뭘까. 한국인이기 이전에 아시아의 평화와 화합을 주창한 의인라는 공감대 때문이다. 기념관 초입에 ‘동양 평화의 창시자’라는 현판을 붙여놨을 정도다. 딱 한 곳에서만 다른 소리가 나온다. 일본이다. “안중근은 사형 판결을 받은 테러리스트”라며 어깃장을 놓고 있다. 교과서와 신문은 안 의사를 어떻게 서술하고 있을까.

1909년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독립투사.

안 의사 집안은 황해도 해주의 향반(여러 대에 걸쳐 지방에 살면서 벼슬에 오르지 못한 양반)이었다. 황해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부호(富豪)이기도 했다. 그러나 안 의사 부친은 전통적 유학(儒學)에만 머물러 있던 보수 유림은 아니었다. 근대적 신문물 수용의 필요성을 인식한 개화적 사고도 지니고 있었다. 부친 영향으로 안 의사도 개화적 사고를 갖고 있었다.

 19세 때는 천주교에 입교해 세례 받은 뒤 충실한 신앙인의 삶을 살았다. 나라가 위기에 놓이자 사재(私財·개인 재산)를 털어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세워 젊은이를 가르치는 교육계몽운동가로 변신했다. 또 하얼빈 의거 후 옥중에서 쓴 『동양평화론』을 보면 사상가로서의 면모도 보인다.

관련 인물: 이토 히로부미(1841~1909)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를 주도한 정치가이자 아시아 침략에 앞장 선 인물.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은 세계 열강(列强) 사이에서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인정받았다. 특히 러일전쟁 이후 두 나라 사이의 강화조약에는 ‘일본이 한국에서 취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되는 조치가 한국 주권을 침해할 경우에는 한국 정부와 합의한 후에 단행한다’고 기록한 후 합의했다. 한국 정부가 합의하면 주권도 침해할 수 있다는 의미 다.

 이토는 주권 침해의 전제 조건인 ‘한국 정부와 합의’를 도맡은 인물이다. 첫 작업이 을사늑약이다. 조선을 일본의 보호 아래 두고, 조선 외교권을 일본이 대신 행사하겠다는 게 을사늑약의 요지다. 이토는 무장한 일본인 헌병이 경운궁(덕수궁) 중명전(대한제국 황실 도서관)을 겹겹이 에워싼 상황에서 고종의 재가를 받아냈다.

을사늑약으로 빼앗은 조선 외교권을 행사한 조직이 통감부다. 이토는 조선의 초대 통감으로 부임한다. 그리고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하고 순종을 즉위시킨다. 순종 즉위 나흘만에 조선 내정권까지 박탈한다는 정미7조약(한일신협약)을 체결한다. 곧바로 조선 군대마저 해산하는 소칙을 발표한다.

 주권을 강탈당하는 과정에서 조선에서는 엄청난 의병이 일어난다. 이토는 일본 헌병과 경찰을 동원해 무자비하게 의병 토벌을 진행한다. 안 의사 등 항일 독립투사들이 대거 해외로 옮긴 것도 이 시기다. 그의 잔인성을 목격한 안 의사는 “애국계몽운동만으로 독립을 이룰 수 없다”며 무장 투쟁으로 노선을 바꾼다.

 또 이토는 당시 조선인을 ‘야만’ ‘무능’ ‘나태’로 규정하고 , 외국에도 조선을 미개한 나라라 알렸다. 을사늑약 체결 후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는 자리에서 ‘ 세계는 본인(이토 히로부미)을 제왕 같은 통감이라 하지만 현명치 못한 사람(조선인)을 상대로 정치를 하려니 실로 암담할 뿐이다’는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쓴 붓글씨. 자신을 취조한 뤼순법원 검찰관에게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는 의미의 붓글씨를 선물했다.

테러 아닌 의거(義擧)

테러의 사전적 의미는 ‘폭력을 써서 적이나 상대편을 위협하거나 공포에 빠뜨리게 하는 행위’다. 의거는 ‘정의를 위해 개인이나 집단이 의로운 일을 도모한다’는 뜻이다.

 가장 큰 차이는 ‘정의를 위한 행동’이라는 목적성에 있다. 정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보편타당한 사실이나 가치다. 아무 목적이 없거나, 목적이 있더라도 특수한 몇몇만이 신봉하는 가치에 따른 행동이라면 의거가 아닌 테러다.

 안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쯤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쐈다. 이토의 몸에 세발의 총알이 박혔고, 오전 10시쯤 숨을 거뒀다. 안 의사는 도망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코리아 우레(대한제국 만세)”를 세번 외쳤다. 구금된 안 의사는 “왜 이토를 죽였냐”는 검찰의 질문에 “민 황후(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한국 황제를 폐위한 죄, 을사늑약·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동양 평화를 파괴한 죄” 등 이토의 15가지 죄상을 조목조목 들어가며 자신의 행동이 의거임을 명백히 밝혔다. 이토를 단순히 조선의 국적(國敵·나라의 원수)이 아니라 ‘동양평화의 교란자’로 규정하고 처단한 것이다. 그의 논리정연한 진술에 놀란 일본인 검찰관은 “당신은 정말 동양의 의사(義士·의로운 지사)”라 불렀다.

 하얼빈 사건이 세계에 알려지자 여러 나라 변호사가 변론을 맡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러시아인 2명, 영국인 2명, 스페인인 1명, 한국인 2명 외에, 무료 변호를 자처한 일본인 1명이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국제변호사 선임을 금했다. 대신 일본 관선 변호사가 나서 하얼빈 의거를 ‘세계의 위대한 인물(이토 히로부미)을 암살한 단순한 살인사건’으로 폄훼한다.

고교 한국사 교과서(8종) 모두 관련 내용 부실

‘연해주에서 의병을 이끌고 활약하던 안중근이 을사늑약 체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이토 히로부미를 1909년 중국 하얼빈에서 저격하였다.’

 한국사 교과서 8종을 전부 뒤져봐도 이 한문장 외에 안중근 의사에 대한 구체적 정보는 찾기 힘들다. 교과서 본문에 달랑 한줄씩이다. 미래엔과 금성출판사는 부록으로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을 간략히 소개했고, 천재교육은 안 의사와 일본인 검사의 문답 한토막을 실었을 뿐이다.

  신문 기사에서 “안중근은 일본의 초대 총리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범죄자”라는 일본의 궤변에 논박할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 있을까.

신문에서 찾은 안중근 vs 이토 히로부미

기사에서는 이토를 특이한 인물(2013년 11월 26일자 35면 안중근 의사를 오스왈드, 문세광에 비유하다니)이라 소개한다. ‘20세기 전후의 그는 열렬한 존황양이(尊皇攘夷·천황을 받들고 서구열강을 물리침) 주의자’ ‘역대 일본 총리 중 전쟁이 아닌 상황에서 살인을 저지른 유일한 사람’이자 ‘외국 공관에 대한 테러도 자행했다’는 것이다.

 살인 배경은 이렇다. 천황 체제를 신봉한 이토는 하나와 지로라는 사람이 천황 폐위에 대해 조사한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해 칼을 휘둘러 하나와를 살해했다. 자신과 정치적 견해가 다른 나가이 우타를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적도 있다. 1862년 12월엔 영국 공사관 방화 사건에 가담하기도 했다. 안 의사가 아니라 바로 이토가 ‘살인범이자 테러리스트였던 셈’이다.

 이토에 대한 기사(2012년 11월 29일자 33면 동양평화 추구한 사상가 안중근)는 또 있다. ‘일본 내에서는 근대 일본을 만든 위인으로 평가받지만 대외적으로는 동양평화를 짓밟은 침략자요, 제국주의자’라는 거다. ‘이토가 만든 근대 일본은 겉으로는 입헌군주제 근대 국가를 표방했지만 사실 그 실체는 이웃 나라들과 끊임없는 전쟁으로 식민지를 확보해나간 전형적인 제국주의 국가였다’는 것이다. ‘청일전쟁으로 대만이 식민지가 됐고, 러일전쟁 후엔 대한제국이 보호국으로 떨어졌다’며 근거도 내세운다. 이토가 주장했다는 ‘극동평화론’에 대한 평가도 나왔다. ‘일본의 지도 아래 아시아 국가들이 하나가 돼야 한다는 구상’이었다는 것이다. 이토의 평화론이 초래한 결과가 뭔가. ‘아시아를 피로 물들인 일본 제국주의의 잔인한 침략 전쟁’(2014년 1월 22일자 29면 아베, 안중근 기념관에 가보시라) 뿐이었다.

 하얼빈 의거에 대한 평가(2014년 1월 21일자 8면 저우언라이 부부도 안중근에 감동)가 곧 ‘안중근 기념관’이다. 기념관 입구부터 안 의사를 ‘동양평화의 창시자’로 명명백백히 밝혔다. 전시 자료는 안 의사가 한국인이기 이전에 동양평화와 화합을 주창했던 의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안 의사가 사형 언도를 받고 옥중에서 집필했다는 ‘동양평화론’의 내용(2014년 1월 28일자 27면 안중근 의사가 테러리스트?)도 있다. ‘구주열강이 노리는 절박한 상황에서 동양 삼국의 결속과 도덕적 역할을 해야 할 문명국이 오히려 야만을 일삼으니 독부(獨夫·포악한 정치를 하여 국민에게 외면을 당한 군주)의 환(患·어려움)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꾸짖음’이 담겼다.

QR코드를 찍으면 안중근 동영상, 관련된 신문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사상가로서의 면모(2014년 2월 4일자 31면 누가 안중근 의사를 감히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나)도 소개했다. ‘자신을 취조한 뤼순법원의 검찰관 야스오카 세이지로에게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 勞心焦思·국가의 안위를 위하여 마음을 쓰고 애를 태운다)는 글을 써주고 자신을 감시해온 일본 헌병에게는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나라를 위해 몸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이라는 글을 선물했다’는 일화와 함께 ‘조국을 넘보는 침략자에게는 총탄을 날렸지만 자기 나라를 위해 복무하는 공직자와 군인에게는 이런 격려의 글까지 써준’ 안 의사의 모습에 대해 ‘동양평화 사상을 주창한 위대한 사상가의 면모가 아닐 수 없다’고 했다.

글=박형수 기자
자료제공=최미정 중동고 역사 교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