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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아산정책연구원 공동기획] “조선인에겐 더러운 피” … 일제가 왜곡한 선비상 아직 못 지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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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호 10면

퇴계를 기념하는 안동시 도산면에 있는 도산서원. 서원은 동서당, 전교재를 갖춘 큰 건물이지만 출발은 사진에 보이는 자그마한 서당이었다. 퇴계 정신은 남인(南人)의 정신적 맥이 됐고 임진왜란과 구한말에는 의(義)의 기치를 내세워 의병으로 발현됐다. 퇴계는 일본의 유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용철 기자
전남 장성의 필암사원. 호남 사림의 중심으로 선조 때 하서(河西) 김인후를 기념하기 위해 후학들이 세웠다.

1680년, 정원로가 재위 6년 차 숙종에 아뢴다.

한국문화대탐사 ⑧ 선비<中>

 “허견(숙종에게 신임받은 대신)이 복선군(인조의 손자·숙종의 5촌)에게 ‘전하 춘추 왕성하지만 자주 편찮으시고 세자도 없는데 불행한 일이 생긴다면 (왕위를) 사양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말없이 듣고 있었습니다.”

 왕에게 변고가 생기면 복선군을 추대한다니. 병이 잦고 후사도 없던 숙종은 역모로 받아들여 병조에 국청을 설치해 국문할 것을 명한다. 끌려온 남인(南人) 허견은 토설한다. “기미년(숙종 5년 1679년) 정월 복선군과 정원로의 집에 모여 왕에게 불행한 일이 생겨 서인들이 임성군(인조의 손자)을 추대하면 화를 면할 수 없으니 대비해야 한다고 논의하였습니다.” 복선군도 고백했다. 그는 교살됐다. 허견과 나머지 관련자들 가운데 2명은 처형, 1명은 사약, 6명은 곤장을 맞다 죽었다. 남인들도 처벌받았다.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다. 출척은 관직을 삭탈하거나 올려주는 것이다. 숙종 때는 장희빈 사건도 있었다.

 건국대 신복룡 명예교수는 숙종조에 정치적 사건으로 죽은 사람을 38명으로 집계한다. 당쟁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것일까? 일본의 식민사학자 오다 쇼고(小田省吾)는 “왕권이 가장 미약했던 숙종 때 당쟁이 격화됐다”고 하지만 신 교수는 “당쟁이 가장 활발했던 숙종 연간은 조선왕조 가운데 가장 흥륭(興隆)했고 백성이 가장 평안했던 시기”라고 한다.

 경신대출척은 오늘날 정치의 비열함과 닮았다는 자조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이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식민사관 굴레를 스스로 뒤집어쓰는 것일 수 있다. 일제는 조선사편수회의 작업이 끝나는 1920년대까지 선비상을 왜곡시켰다. 그 중심에 어용학자 5인이 있다.

 선두는 시데하라 다이라(幣原坦). 그는 1904년 『한국정쟁지』라는 논문으로 동경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다. 서론이 고약하다. “조선 정치는 사사로운 권리 쟁탈이다. 음모가 계속되고 참화를 불사한다…당쟁은 음험하다. 뼈를 깎고 시체에 채찍질하는 참화를 연출한다…한국이 일본의 고문(顧問) 정치에 처하게 된 원인은 고질적인 당쟁이다.” 선비의 결사인 붕당(朋黨), 당끼리의 논의(黨議) 역사를 질곡으로 내몬 일제의 첫 공작이다.

 훗날 타이베이(臺北)제국대학 총장까지 지낸 그는 뒤틀린 인물이다. 시데하라는 일본에 유학을 전한 왕인(王仁) 박사의 묘가 있는 오사카 출신. 대학 졸업 뒤 1900년 11월 대한제국의 요청으로 학부(교육부) 고문이 돼 관립고등학교(경기고)의 외국인 교사로 온다. “천년 전 받은 문화적 은혜에 보답할 좋은 기회”라는 게 이유다. 그러나 4년 만에 당쟁을 폄하하며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 그는 학정참여관으로 소학교 개혁에 참여하지만 봉급만 축낸다는 조선 언론의 비난을 받다 1906년 해고돼 돌아간다.

 뒤를 다카하시 도루(高橋亨)가 잇는다. 역시 동경제대 출신인 그는 시데하라의 후임으로 관립고등학교 교사가 됐다. 그리고 1912년 4월부터 6차에 걸쳐 ‘조선 및 만주’에 글을 쓰며 조선 주자학(성리학)의 특징은 ‘종속성·사대성·분열성’이라고 했다. 1914년 『조선의 이언집 부 물어』라는 책에선 ‘조선사회 내면엔 ▶사상의 고착성 ▶사상의 무창견(無創見) ▶당파심 등 6개 형질이 있다’고 했다. 전주대 이형성 외래 교수는 “다카하시는 시데하라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총독부는 다카하시의 주장을 담은 『조선인 특성의 연구』를 단행본으로 만들어 1920~21년 전국에 배포했다.

 경성제대 예과 교수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는 1912년 최초로 한국통사인 『조선통사』(일어판)를 쓰면서 한 장(章)을 당쟁에 할애했다. “당파는 확고한 주의강령이 아니라 형세에 따라 동서남북으로 나뉜 것”이라고 썼다. 대학 교재로도 사용됐다. 신복룡 교수는 “그는 최초로 당쟁사를 확대 재생산한 역사적 책임이 있는 인물”이라고 지적했다.

 가장 오염된 일인은 기자 출신 호소이 하지메(細井肇)다. 1921년 쓴 81쪽짜리 『붕당·사화의 검토』는 가관이다. “조선인에겐 특이한 더러운 피가 흐른다…희대의 영웅도 붕당의 악폐는 근절시키기가 어렵다. 그 피를 어쩔 것인가….” 이 때문에 그는 ‘조선 멸시론자’의 대표로 간주된다.

 이후 ‘당파성론’은 오다 쇼고에 의해 확대 재생산된다. 그는 동경제대 문과 출신으로 1908년 학부 서기관으로 한국으로 왔다. 조선사 왜곡의 선봉인 조선사편수회의 위원으로 1922~25년 완간된 『조선사강좌』 시리즈의 실무 책임자이자 핵심 역할을 했다. 이 시리즈로 식민사학은 완성된다. 경성제대의 조선사 강의교재로 썼고 오다는 퇴직 때까지 경성제대 사학과에서 식민사학자를 길러냈다.

 식민사학의 독은 한국인의 정신을 오염시켰다. 『한국 당쟁사』를 쓴 매일신보 기자 출신 홍승구가 대표적 인물이다. 신 교수는 “홍승구는 ‘개벽’지에 당쟁 망국론, 당쟁 500년, 이조 당쟁사를 썼다. 홍경래란도 당쟁이었다는 식이다. 식민사학의 첨병이었다”고 했다. ‘개벽’지 주간 차상찬도 1934년 ‘사화와 당쟁’을 쓰면서 오다의 글을 베끼다시피 했다.

 식민사학자에게 ‘조선인 기질론’은 중독 같은 것이었다. 미시나 쇼에이(三品彰英)는 1940년 『조선사개설』에서 “유력한 권위 아래 모이고 당벌을 결성하는 것은 조선의 국민성, 민족적 결함이다. 붕당의 항쟁 시간은 세계적 기록이다. 한인은 뇌동성이 특징이다”고 했다. 시카타 히로시(四方博)는 1951년 『구래의 조선사회의 역사적 성격』에서 “조선 민족의 특징은 파벌성”이라고 했다.

 식민사관의 악영향은 우리 안에도 내재돼 있다.

 “17세기 이후 사림파끼리 반목질시하였다. 이해관계와 학파·지연 차이에서 붕당을 만들고, 당에서 당이 갈리고 파에서 파가 갈려 모함·중상을 일삼고…당쟁은 조선 후기 정치사의 큰 오점으로서 민족을 분열시키고 민생을 피폐하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

 일제 식민사학자의 글 같지 않은가? 유감스럽게도 문교부가 발행한 1977년판 인문계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서 당쟁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그렇게 배운 지금의 50대 이상은 ‘선비’ 하면 ‘당파’부터 떠올리고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아산정책연구원이 최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선비정신을 부정적으로 본 사람들은 그 이유로 권위주의(43.8%)-당파 싸움(22.8%)-융통성 부재(17.8%)를 꼽았다. 당파 싸움을 꼽은 이들 가운데 40대 이상의 비율이 평균보다 훨씬 높거나 웃돈다.

 그렇다고 붕당의 심각성을 외면하자는 것은 아니다. 조선 내부에서도 경고는 계속 나왔다. 선조시대 영의정 이준경은 임금에게 보내는 유소에서 “허위지풍(붕당 싸움)을 없애지 않으면 국가가 어려운 근심을 맞는다”고 했다. 형을 당쟁으로 잃고 벼슬길도 끊긴 남인(南人) 이익은 『성호집(星湖集)』에서 “과거를 자주 실시해 사람은 많은데 관직은 적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유수원(柳壽垣)은 『우서(迂書)』에서 “문벌과 주론자(主論者)들로 인해 당쟁이 발생했다”고 지적한다. 언론을 주도하는 3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주론자가 배후와 결탁, 여론을 조작해 당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3사의 전횡을 막아야 한다는 대책도 내놨다. 그 자신 당쟁의 희생자인 이중환도 『팔역지(八域誌)』에서 대간을 뽑는 이조전랑제의 문제를 지적했다. 박제형은 『조선정감(朝鮮政鑑)』에서 “사적 이해관계에 따라 공론이 달라져 당쟁이 발생한다”고 했다. 조선말기 이건창도 『당의통략(黨議通略)』에서 “시비가 불분명한 일로 거국적인 붕당 시비가 200년간 계속됐다”고 했다.

 그럼에도 비판 논리만으로 붕당 논쟁을 비난할 수는 없다. 긍정론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율곡 이이가 당의에 가담한 데 대해 선조는 “이이만 같다면야 당이 있는 게 아니라 적어 걱정이다. 나도 주희의 말과 같이 그대들의 당에 들고 싶노라”고 칭찬했다.

 ‘보수·진보’로 붕당을 설명한 율곡은 “동인은 대부분 연소한 신진이다…이끌고 도와야지 배척하고 눌러 뜻을 저지해선 안 된다. 서인은 대부분 선배 구신(舊臣)인데 결점을 감싸고 장점을 드러내야지 배척해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비판자인 이중환도 “전랑권은 폐해에도 불구하고 300년간 계속된 긍정적 제도”라고 했고, 이건창도 “그들이 자신을 위하여 도모한 것은 적고 나라를 위한 것이 컸다”고 짚었다. 윌리엄 그리피스도 『은자의 나라 조선』에서 “(붕당) 당사자들의 목적은 유럽·미국 정당이 추구한 것과 다르지 않다”고 평가했다.

 붕당은 유학의 본령에도 어긋나지 않는다. 송(宋)대의 구양수는 “붕당은 예부터 있었던 일이며 자연스러운 이치”라고 했고, 성리학 대성자인 주자도 “붕당은 염려할 것이 아니다. 군자의 당이라면 인군(임금)도 그 당이 되게 이끌어야 한다”고 했다.

 일본인 이나바 군잔(稻葉君山)도 “당론은 사회문화 발달에 따라 생기는 보편적 산물이다. 없다면 문화가 저급한 것”이라고 했고, 이시이 도시오(石井壽夫)도 “붕당 출현으로 조선은 회춘을 맞았다…당쟁이 경직되면서 우세한 무리들은 안일에 빠져 무능·무력해졌다”고 했다. 붕당엔 순기능·역기능이 다 있는 것이다. 시데하라류(類)의 ‘민족성론’은 “그렇다면 삼국에서 고려 때까지는 왜 안 그랬는가”라는 반론에 부닥친다.

 그리고 당쟁이라는 용어. 서울대 이태진 명예교수는 ‘당파성 비판’이란 글에서 “시데하라의 『한국정쟁지』가 당쟁 개념을 처음 사용했다”고 지적했다. 조선 용어는 당의(黨議)다.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하니 ‘당쟁’은 영조 때 한 번 나올 뿐이며 ‘당의’가 60여 회 나온다.

 당쟁이 사라진 영·정조 이후를 면밀히 볼 필요도 있다. 추상 같은 정론이 사라지면서 삼정이 문란해지며 순종·헌종·철종 시대엔 세도정치가 나타났다. 탕평책은 ‘무정치 현상’을 유발한 것이 아닐까. 정옥자 서울대 명예교수는 “정조 사후 기존의 붕당이 관료 집단화하면서 권력이 왕의 근신에게 넘어가고 세도정치가 시작됐다”고 지적한다. 그런 흐름은 학문 연구에도 반영된다. 본지가 1981~2012년 당쟁을 주제로 한 논문 19편을 조사했다. 9편의 논문은 부정적으로 인식했지만 10편은 긍정적 요소가 있다고 본다.

 이런 글이 있다.

 “붕당정치의 원리는 세력 균형을 바탕으로 상호 견제와 비판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상대의 비판을 의식해 책임정치를 해야 했고 정책의 실패가 나타나면 자연스럽게 정권교체가 이뤄졌다…그러나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면서 대립과 분열이 격화돼 국가 발전에 커다란 지장을 초래하기도 했다.” 법문사의 『한국사』 교과서 붕당 부분이다. 77년 이후 30여 년 만에 두드러진 변화다.

 다시 맹자의 가르침으로 돌아가 본다.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가 스스로를 모독한 연후에 남들도 그를 모독한다.”

 우리가 먼저 선비의 가치를 회복하면 다른 이들도 높이 받들 것이라는 의미로 새겨도 좋을 것이다.



취재지원=아산정책연구원 김보아 연구원 이용익·임보미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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