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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심은 한국」「시리즈」계기로 90년만에 발견된 김옥균 애처 사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구한말의 풍운아 고균(고균 김옥균) 선생의 생애 마지막 수년간을 모셨던 일본 기녀 「교꾸죠」(옥녀)의 사진(1887년께 촬영)이 90년만에 처음으로 발견됐다.
이 귀중한 사진 한 장은 김옥균의 북해도 유배생활시절(1888∼89) 그가 잠시 유숙하고있던 「하꼬다데」(함관)시의 「와다」여관주인 화전유일씨의 손자 화전정일씨(70·동경도목흑구중목흑 4-12-7·현 왕자「콘스타치) 주식회사 사장)가 소중하게 간직해 오다가 얼마 전「하꼬다데」도서관에 기증한 것.
화전씨는 중앙일보에 연재된 장기「시리즈」 『일본에 심은 한국』(73년8월1일∼74년7월30일)의 일본말번역(『아시아 공론』 금년 5월·10월호)을 읽고 자진해서 본사에 그녀에 관한 자료를 보내준 것이다.
이른바 『3일 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의 실패이후 일본으로 망명했던 김옥균은 고종 31년(1894년2월) 자객 홍종우의 손에 의해 중국 상해에서 암살되기까지 약 10년간을 일본 각지를 전전하면서 한 많은 생활을 지속했던 것. 당시 한창 정년기(34∼44세)에 있던 김옥균이 일본서 사귄 여인들은 한 두 사람이 아니지만 그 중에도 이 옥녀 만큼 김옥균의 인격을 흠모해서 사후의 뒷바라지까지 한 여인은 드물다.
사진 뒷면에는 「전촌연조 사진관」의 「스탬프」가 찍혀있고 그 위에 붓글씨로 『봉래정 예기 옥녀』란 설명이 있다. 화전씨의 설명에 의하면 그녀가 바로 김옥균 선생의 애처였다는 사실은 「하꼬다데」도서관의 전 관장 고 강전건장씨에 의해 확인된 것이라고 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강전씨는 명치시대 일본의 유명한 시인 「이시까와·다꾸보꾸」(석천탁목)와도 친교가 있던 문필가로서 생전의 김옥균과도 지면의 사이였다.
화전정일씨는 본사에 보낸 서신에 김옥균의 「하꼬다데」체재 중 묵고있던 화전여관의 사진도 동봉해왔다(이 여관은 명치 40년(1907)의 대화로 소실되었다).
김옥균과 옥녀의 관계에 대해서는 본지에 연재한 『일본에 심은 한국』제9화 <고균 김옥균의 유랑행적기>(제50회)에 상세한 언급이 있었지만, 당시 김옥균과 친교가 있던 일본의 몇몇 지사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얘기였다.
일본의 우익지사로서 후일 손문을 도와 중국에서 거병한 일도 있는 궁기도천의 저서 『33년의 꿈』에도 이런 귀절이 있을 정도-.
…김옥균의 장례(그의 암살소식이 있은 직후 동경에서 거행됨)가 끝났을 때 나는 한 여인과 인사할 기회를 가졌다. 이름은 「옥」, 북해도 산. 일찍이 김옥균을 따라 동경에 왔고 김옥균이 상해로 떠날 때는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김옥균의 노자를 도와주기도 했다는 여인. 친구와 함께 그녀를 배웅해서 집까지 갔더니 옥은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여자의 몸이고 「도오쨩」(바깥양반, 옥은 생전의 김옥균을 이렇게 불렀던 것 같다)의 깊은 뜻은 헤아리지 못하며, 또 세상일을 이러쿵저러쿵 얘기할 수도 없습니다만 선생님들께서는 생전의 우의를 생각하셔서라도 앞으로의 일을 잘 돌봐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아무쪼록 안녕히…. 혹 저 같은 여자라도 무슨 일이 있어 찾아주시면, 언제라도 잡수시는 것 쯤은 불편이 없도록 시중 드리겠습니다. 저야 별 수없이 또다시 흐르는 강물 위에 뜬 대나무 신세가 됐습니다만….』
이국의 풍운아에게 정을 주어 성심성의 지아비로 받들던 낭군을 비명에 가게하고 난 다음의 애절한 여심이 9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지금도 우리에게 생생한 감동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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