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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74년의 도의적 반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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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우리는 많은 문제를 남겨놓은 채로 1974년을 보내고 있다. 그 모든 문제는 우리들의 도의심과 깊은 관련을 맺고있다. 그러므로 올바른 정신적 방향과 가치관의 실정이 없이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이었다.
열매의 맺음 없이 꽃이 떨어지고 잎들이 마른다고 해서 그 나무의 병이 가지나 잎사귀에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병의 근원은 그 뿌리와 줄기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문제를 피상적인 정치나 경제적 미봉책으로 해결할 수 있는 듯이 잘못 생각해 왔다. 가장 긴급하고도 근본적인 과제는 언제나 우리들의 사고와 인간됨에 있으며 그것은 또 어떤 도의심과 가치관을 갖는가 함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런 점들을 고찰해볼 때 우리는 민족의 장래와 소망스러운 사회를 위해 다음과 같은 몇가지 사실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첫째로 문제삼고 싶은 바는 잘못된 사회의식의 순화다.
우리는 극단의 사회주의를 신봉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와 이에 단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자유개인주의의 중간지대에 살고 있다. 그 어느 하나의 선택이 불가피하게 되어 있었다.

<잘못된 사회의식 정화 시급>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가 인간적 삶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어떤 개인도 사회를 위해서는 부정당할 수 있으며 인간은 누구나 정치 경제적 생산, 집단의지를 대신하는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며 그것들을 위해 희생되어 마땅한 것으로 믿고 있다.
이에 비하여 자유민주정신은 개체는 모든 생존과 사회의 출발이며 목적이라고 주장한다. 온갖 것은 인간을 위해 있으며, 인간은 곧 개인 즉 나라고 생각한다. 본래적인 자본주의도 이 정신을 기반으로 탄생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비극이 있다. 우리는 그 어느 사회에서도 자라지 않았으며, 또 그 어느 편도 우리가 만들어낸 정신적 풍토는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어느 한편에 치우치거나 빠져버려 정상적인 개체와 전체관계, 즉 자아와 사회간의 올바른 관계와 입장을 찾지 못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가 이 사회와 전체를 영구히 절대화하는 데서 역사적 모순을 거듭하고있음을 잘 알면서도 우리들 중의 일부 지도자들은(그들이 소속되어있는 전체를 대표하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동안에 집단적인 전체의식을 절대화하려는 폐단을 버리지 못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고방식은 연로한 계층의 불행한 습성이다. 그들 스스로가 「마르크스」주의를 강하게 반대하고 있으면서도 우리 사회와 개인들을 대하는 태도와 자세는 여전히 집단과 전체의식에 빠지는 경향이 뚜렷하다.
이와 반대되는 현상이 젊은 세대와 지성인들에게 나타나고있다. 그들은 자아 중심의 민주체제를 신봉하고 있다. 그러나 건전한 개체의식 즉 개인주의가 사회를 위하는 시민의식으로 성장하고 그 시민의식이 자라 민주사회를 육성하게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소장세대들은 자기중심의 개인사상, 때로는 잘못된 이기주의가 그대로 자유인 듯이 착각한다. 사회를 위한 개인이며 전체를 위한 개체의식만이 진정한 개인주의임을 깨닫지 못한다.
만일 이런 두 가지 사고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다면 우리는 영구히 모든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서구사회는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끈질기게 새로운 사회과학들을 모색해 왔다.
경험주의와 공리주의가 있었는가 하면 「아메리카」는 실용정신을 개발했다. 대륙에서도 합리주의나 실증정신이 대두했는가 하면 인격적 공존을 뜻하는 실존주의를 제창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사회의식을 정화시켜 나가야 한다. 내가 믿는 것은 전부가 옳다거나 절대라는 생각은 통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세계 속에서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하며 우리 민족이 앞으로 어떤 역사를 창조해 가야 하는가를 계속 모색하지 않으면 안된다. 모든 분야의 지도자들은 자신과 같이 있거나 지도 밑에 있는 개인들을 위해 생각을 넓혀야 하며 지성을 갖춘 개인들은 순화된 사회의식을 갖고 건설적인 참여에 임해야 한다.
한때 영국인들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정신으로 그 사회를 구출한 바 있다. 그들대로의 순화된 사회이념 이었던 것이다. 오늘 우리들이 관심을 모으고 있는 북구의 복지국가들은 국민은 최대의 것을 국가에 바치며, 정부는 최선의 것을 국민들에게 돌려준다는 신념을 지키고있다. 이러한 기여체계의 사회의식이 없이는 선량한 복지사회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건전한 사회의식의 개발과 육성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물질주의가치의 치중은 퇴락>
둘째로 우리가 요망하는 것은 균형있는 가치관의 설정과 사회능력의 조화있는 다원화다.
새는 두 날개를 가져야 하늘을 날수 있다. 그리고 그 두 날개는 균형이 절대적이다. 우리들의 과오는 어디 있는가. 물질을 추종하는 향락의 가치는 누구나 인정하면서 정신적 가치와 문화를 존귀하게 여기는 가치의식은 날이 갈수록 퇴락해가고 있다. 이 균형이 깨진 가치의식을 바로잡기 전에는 모든 사회적 범죄의 일소나 청소년들의 정당한 성장은 기대할 수 없어진다.
우리는 문화를 창조하지 못하는 민족이 생존해 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일본이 우리의 군사력과 정치권을 빼앗고 경제를 탈취했으며 소위 창씨까지 강요해보았으나 우리말과 문자가 남아있는 한 한민족은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최후의 정책으로 우리 문화의 말살운동을 전개했음을 잘 알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과 같이 물질과 쾌락이 인생의 전부라는 거센 풍조를 시정하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는가. 대학이 취직을 위한 방편으로 떨어지며 문화활동들이 정치의 수족이 되는 사회는 영원한 불행을 면치 못하게 된다.
이러한 사고방식과 가치관이 굳어지게 되면 사회는 반드시 일원적 가치에 생활의미를 예속시키는 단세포 및 동질세포사회로 굳어져 버린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폐쇄사회라고 부르며 또 어떤 입장에서는 본질적 의지사회라고 지칭할 수 있는 위험을 가져온다.
우리가 공산사회를 거부하는 가장 큰 원인이 여기에 있다. 얼마 전 일본을 거쳐 북한에 다녀온 지성인 간첩이 공산북한은 이미 병들어 굳어진 사회이며 거기에는 정권의 주변을 제외하고는 인간적 삶이 배제당한 곳이라고 평하고 있었다. 공산주의나 독재사회를 비롯한 모든 전체주의의 결과가 바로 그런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율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하며 국민은 모두가 스스로 타고난 능력과 선한 의지를 국가에 이바지함으로써 똑같은 명예와 경제적 보수와 사회적 존재가치를 누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물량적인 힘과 정신적 능력이 공통된 목적을 위한 다원적 책임과 의미를 지녀야 한다. 경제가 정치와 공존해서 발전하며, 생산과 문화가 서로 협소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에 기여하는 선한 노력은 언제 어디서나 모두가 똑같이 귀하게 평가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오늘의 사회를 걱정하는 사상가들의 충고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그들은 경제적발전과 정신적 자유를 보존시켜 왔음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참여의식을 상실하고 있는 국민들의 급증으로 사회적 위기를 맞고 있음을 자백한다. 우리도 부와 자유와 참여를 동시에 염원하는 사회풍토를 조성해가야 한다. 만일 참여를 거부하는 총화를 생각하는 지도층이 있다면 그것은 공존의 원칙을 무시하는 당착을 초래하게 된다.

<자유와 질서는 함께 자라야>
우리가 다원적 가치사회를 원하면서 힘의 통합 있는 분산을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 그것이 모든 일원적 가치로 달리는 공산전체주의를 극복하는 길이기도 하다.
세 째로 우리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자유의 여건문제다.
최근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자유를 많이 논하고 있다. 후진사회는 계속 자유를 요청하고 있는 동안에 성장한다고 보아 잘못이 아니다. 자유는 인간적 생존의 핵심이며 민주사회가 개개인의 자유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자유의 열매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씨를 뿌리고 나무를 가꾼 뒤 때가 오면 열매는 저절로 맺는 것이 자연과 역사의 법칙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를 논하고 자유를 원하는 것만큼 자유가 주어지는 여건을 더 신중히 생각할 필요가 있다.
서구의 역사가들은 자유의 향상이 그대로 역사의 발전이라고 믿으며 주장해 왔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그리스」인들은 자유보다도 「로고스」 즉 이성을 더 존중히 여겨온 백성이었다. 말하자면 자유는 이성과 공존한다는 것이 그들의 통념이었다. 그리고 그 정신은 2천 5백년 전의 「헤라클레이토스」로부터 19세기 중엽의 「헤겔」까지는 말할 것도 없으나 오늘까지도 계승되어오는 정신적 유산이다.
우리도 이성적 사고나 행위가 동반하지 않는 곳에는 자유가 자랄 수 없다는 신념을 굳혀야 한다. 비이성적인 판단이 일상화되고 반이성적 주장을 되풀이하면서 자유만을 호소한다면 그것은 불신을 만들면서 부정을 없애자는 생각과 같이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 모두가 이성적으로 판단하며 그 이성에 따라 행동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이성을 존중히 여긴다는 것은 자유는 이성적 생활의 유산인 질서와 함께 성장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질서가 없는 자유나 질서를 무시하는 자유를 요망해서는 안된다. 질서는 참다운 자유와 더불어 성장하며 자유는 언제나 그 질서 속에 머무르게 돼있다. 성숙되지 못한 사회의 폐단이 바로 여기에 있다. 질서 없는 자유를 원하는 대중이 있거나 질서를 무시하는 지도층이 있는 사회는 언제나 불행을 면치 못한다.
애국심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애국심이 바로 질서에 대한 책임과 사랑임을 모른다면 그들은 진정한 애국자가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비애국자는 농민이나 노동자나 국민학교 선생들이 아니다. 질서를 파괴할 수 있는 지도층, 특히 권력과 금력을 남용하거나 자신들의 명예만을 위하는 상위계층에 갈수록 비애국자는 많게 마련이다. 힘은 정의를 통하여 선한 질서를 높이는데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유의 가장 소중한 여건의 하나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에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연말이 되면 가장 강렬하게 인권이 호소되면서 어느 때보다도 이웃돕기 운동이 활발히 전개된다. 누가 시키거나 요청한 것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전개되는 사회의 모습이다. 그것이 바로 자유는 사랑과 공존한다는 증거다.

<자유의 소중한 여건은 사랑>
사랑이 없는 자유는 끝없는 경쟁과 대립을 가져오며 그 결말은 비참한 파멸이다. 공산주의자들의 사회악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을 거부한 평등 때문에 생기는 것들이다.
민주주의의 단점이 있다면 그것도 사랑이 없는 자유에 기인한다.
종교인들은 자유와 평등의 열매는 사랑의 나무에만 맺을 수 있다고 믿는다. 사랑이 없는 정의·평등·자유·평화는 실제에 있어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자유에 관한 폭넓은 생각을 해야 하며 진실하고도 영구한 자유가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과 지혜를 경주해야 한다.
끝으로 우리가 바라는 것은 소망스럽고도 선한 사회이념을 찾아 구현함이다.
불행한 사회에서 항상 듣는 말은 부정과 거부의 요청이다. 「무엇을 하지 마라」, 「무엇을 해서는 안된다」, 「왜 그렇게 하는가?」 따위의 말들이다. 옛날 일본인들의 교육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는 건전한 윤리나 도의가 자라지 못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이 바람직한가?』를 같이 찾아가는 사회가 가장 발전적이며 참여와 총화가 가능한 사회다. 그리고 그 태도가 상하의 계층을 없애주며 대화에 의한 객관적 방향과 가치를 찾아주기도 한다.
그러면 언제 그 일이 가능한가. 우리는 우리대로의 이상을 갖고 공통된 사회이념을 찾아 구현코자 노력할 때 비로소 그 뜻이 가능하다. 명령은 빠른 결실을 가져오는 것 같아도 그 결과는 곧 사라지고 만다. 대화를 통한 모색과 탐구의 자세가 무엇보다도 아쉽다.
2차 대전 뒤 서독의 정신적 바탕을 만들어준 정신운동은 대화를 통한 인간관계의 회복이었다. 그들이 동양 몇 나라와 우리 사회에 「아카데미·하우스」를 원조해준 것도 이 대화를 위한 운동이었다.
사람들은 미국이 단시일 안에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것은 그들의 대화교육의 결과였다고 평한다.

<소외된 인간 먼저 돕기부터>
우리도 밝은 사회의 이념이나 홍익인간의 정신을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았다. 문제는 어떻게 그 이념을 재확인하며 그 뜻을 구현해가는가 함이다. 모든 인간들로 하여금 인간답게 살도록 서로 돕는다는 홍익인간의 정신은 온갖 「휴머니즘」을 포함하고 있으며 밝은 질서의 확립은 근대사회의 표준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도달하는 방법은 건전한 대화의 자세다. 대화는 객관적 가치를 추구하며 공동목표를 찾아 설정하는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대화는 의견을 가지고 참여하지만 의견의 동참이 없이는 행동의 협력이 불가능하다. 말하자면 건설적인 참여는 대화로부터 출발한다는 결론인 것이다. 여기에 사회와 자아의 문제가 정리되며 동양의 긴 전통이 요구해 온 대동소이의 정신도 그 의미를 찾는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는 사회적 순서와 절차가 있어야 한다. 그 순서와 절차는 무엇인가. 모든 일의 최후의 목적은 인간에게 봉사함이며 그 순서는 소외당한 사람들을 먼저 돕고 위한다는 원칙이다. 이러한 궁극적인 목적과 절차의 설정이 국민총화의 길은 물론 건전하고도 발전적인 역사를 개척해가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희망은 찾는 자에게 주어지며 노력하는 사람이 스스로를 구출하는 것이다. 밝은 내일을 창조하기 위해 민족적 슬기와 용기를 다할 때가 왔다고 믿는다.
대표집필 김형석
참석자
고범서(숭전대학감·기독교윤리학)
이헌구(이대교수·불문학)
장기근(서울대문리대교수·동양유닐학)
조동필(고려대교수·경제학)
김형석(연세대교수·철학)
주제 74년의 도의적반성
일시 1974년12월14일
장소 중앙일보 회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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