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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고

안현수 조국은 아이스링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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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형오
부산대 석좌교수
전 국회의장

요 며칠 소치 겨울올림픽 중계 보느라 잠을 설쳤다는 사람이 많다. 그중에서도 단연 화제는 안현수, 아니 빅토르 안 선수다. 안 선수가 결승점에 가장 먼저 도착해 두 팔을 번쩍 들어 환호하는 모습, 몸을 엎드려 얼음판에 입맞추는 모습…. 관중석에선 눈물로 범벅 된 그의 부친과 여자친구 얼굴이 클로즈업됐다. 러시아 국기가 올라갈 때 안 선수는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서 가슴에 손을 댄 채 러시아 국가를 소리 내어 불렀다. 늠름하고 당당하게.

 TV를 본 많은 국민은 마음이 매우 착잡했다. 나는 안 선수가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다. 시상대 위의 그 한순간은 지난 8년 세월의 총결산이다. 그의 눈동자는 TV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쿨했다. 그 냉정함이 우리 국민을 숙연하게 했다. 반면에 그 명랑하던 이상화 선수는 1주일 전 시상대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애국가가 연주될 때 눈물을 흘렸다. 모든 국민이 함께 울먹였다. 참 자랑스러웠다.

 안 선수 아버지와 여자친구가 흘린 눈물은 지난 8년의 한(恨)이었을 것이다. 뒷바라지의 힘듦이 눈물과 함께 날아갔을 것이다. 두 사람은 안 선수 대신 울었다. 귀화(歸化)란 단어가 조국을 버리는 일로 여겨져 우리는 귀화를 잘 하지도, 잘 받지도 않는 민족이었다. 그러나 이제 다문화가정의 확산으로 주변에서 흔히 보게 되는 현상이다.

 정치적 신념에 의한 망명이나 돈벌이를 위한 국적 포기는 왕왕 있어 왔다. 그러나 안 선수처럼 운동을 계속하기 위해 새로운 조국을 택한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다. 결과적으로 앞길이 창창한 올림픽 3관왕을 조국은 버린 것이다.

 불화, 파벌싸움, 권위주의, 소속 팀 해체, 부상과 수술로 20세의 빙상 천재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그를 받아줄 새로운 나라를 택했다. 모든 게 낯선 그곳에서 그의 유일한 친구는 스케이트화였다. 자유와 도전, 창의력을 발휘할 유일한 공간은 아이스링크였다. 속박받지 않고 눈치 보지 않고 신나게 달리고 달렸다. 그의 부활은 러시아엔 팡파르, 한국엔 경종을 울렸다.

 한국은 엘리트 스포츠를 하는 대표적인 국가다. 최고의 선수를 길러내기 위해 어릴 때부터 철저하고도 체계적인 훈련을 시키는 나라다. 태릉선수촌으로 상징되는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 체계는 다른 나라의 벤치마킹 대상이다. 스포츠 엘리트들을 집중 육성함으로써 스포츠 보편화와 대중화를 견인하는 정책이다. 그런 정책으로 우리는 김연아 같은 보배를 발굴·육성해 세계적인 찬탄과 부러움을 사고 있다. 선수의 천재성과 노력 그리고 국가 지원이 맞아떨어진 절묘한 경우다.

 그러나 이번 쇼트트랙의 몰락은 제도와 체제에 안주한 결과다. 빙상계는 물론 한국 스포츠계 전반에 혁신의 필요성을 알리는 에밀레종이다. 4년마다 냉정한 평가를 받는 것이 올림픽과 선거다. 더 나은 인물, 더 훌륭한 선수가 나오지 못하는 것은 제도와 조직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조직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바로 그 걸림돌이 아닌지 생각해 보라. 한때 정치권에선 승마 선수를 영입해야 정치가 잘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말과 행동을 같이하기 때문이란다. 승마 선수가 말(馬)을 사랑하듯 정치인도 말(言)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 정치인이 드물기에 정치가 신뢰를 잃은 것이다.

 안현수는 빅토르 안이 되었다. 그의 조국은 이제 러시아다. 그는 자신을 인정하고 대접해 준 두 번째 조국에 멋지게 보답했다. 자신의 말을 지켰다. 러시아에 대해서, 스스로에 대해서. 그에게 스케이트화를 다시 신겨준 러시아가 고맙다. 그를 우뚝 솟게 해 한국 빙상계에 철저한 각성의 계기를 마련해 준 러시아가 그래서 고맙다. 소치 올림픽은 언행이 일치하는 스포츠 수퍼스타를 탄생시켰다. 그의 조국은 아이스링크다.

김형오 부산대 석좌교수, 전 국회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