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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우리도 … 닭장 문 열 때마다 두렵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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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전북축산위생연구소 정읍지소의 이재욱(가운데) 수의사가 AI 전염 검사를 하기 위해 지난 14일 닭에서 시료를 채취하고 있다. 그는 AI 발생 한 달 동안 닭과 오리살처분 현장에 12번 출동해 수십만 마리의 닭·오리를 묻었다. 이씨는 “담당 공무원의 숙명이겠지만 살처분은 차마 못 할 일”이라고 말했다. [프리랜서 오종찬]

지난달 16일 전북 고창의 오리농장에서 조류 인플루엔자(AI)가 처음 발생한 뒤 한 달. 닭·오리 395만 마리를 살처분하고 방역을 강화했지만 AI는 여전히 번지고 있다. 지난 15일엔 충남 천안·청양과 강원도 원주에서까지 고병원성 AI 바이러스가 검출됐다. 얼마나 더 AI가 기승을 부릴지 모르는 상황에서 시름하는 농민과 방역 담당자를 만나봤다.

내달 초까지 버텨야 출하, 초조함 커져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에서 닭 농장을 하는 김광석(66)씨. 오전 5시에 일어나 농장에 달려가서는 밤새 별일 없었는지 확인하는 게 일과가 됐다. AI 소식이 들린 한 달 전부터다. 처음엔 축사 문 열기가 두려웠다고 했다. 혹시나 수백 마리가 죽어 넘어져 있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초조함은 자꾸 커갔다. 전북에서 발생한 AI가 점점 북쪽으로 올라와서였다. 급기야 지난달 27일엔 12㎞ 떨어진 서신면 닭 농장에서 AI가 터졌다. 당연히 설은 사라졌다. 온 가족이 방역작업을 했다. “십여 리 떨어진 데 친척들이 모여 살아. 설마다 모였지만 올해는 안 갔어. 닭 저승 보내고 싶지 않아서.”

 김씨는 일단 소독과 닭 상태를 살피는 데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오전 5시부터 밤 12시까지 닭 옆에서 산다. 일단 목표는 어떻게든 다음 달 초까지 견디는 것. 그때면 적당히 자란 닭을 내다 팔 수 있다. 하지만 부근 농장에서 AI가 나오면 수포로 돌아간다. 김씨는 “그저 내 할 일 하고 아무 일 없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파묻은 숫자 못 세” 수의사도 고통

  한 달 동안 출동 12번. 그동안 몇 마리나 살처분했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전북축산위생연구소 정읍지소의 이재욱(32) 수의사가 그랬다. 임무는 AI가 발견된 지난달 16일 시작됐다. 처음엔 방역과 시료 채취 같은 일을 맡았다가 이틀 뒤인 18일부터 살처분 현장에 투입됐다. 일손이 모자라서였다.

 살처분에 “철새가 죽어 있다”는 신고까지 일이 쉴 새 없이 몰려들었다. 퇴근해 집에 간 건 평균 1주일에 이틀 정도. 나머지는 연구소에서 비상 대기했다. 피곤에 절어 입술이 부르트고 입안이 헐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저보다 더 힘들어하시는데…. 참고 견딜 수밖에요.”

 열흘쯤 전 태어난 지 두 달 된 아들이 감기 증상을 보였을 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고 했다. 다행히 그냥 감기로 이젠 다 나았다. “동물을 살리는 수의사로서 살처분하는 게 정말 괴롭습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지만, 이것만큼은 하루빨리 피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빚내 키운 오리, 괜히 신고했나 후회도

  전북 고창과 부안에서 오리 농장 2곳을 운영했던 김현근(54)씨. 그는 요즘 오후를 동네 작은 식당에서 보낸다. 막걸리나 소주를 들이켜면서다. 지난달 22일 2만 마리를 살처분한 뒤 생긴 일과다. “어쩌겠어. 할 일은 없고, 날린 돈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이거라도 마셔야 살 것 같아.”

 김씨가 기르던 오리를 살처분한 것은 내다 팔려던 예정일 하루 전이었다. 고창에서 AI가 발생했다는 소식에 매일 농장을 소독하고 점검하던 중 이상 증상을 발견했다. 그게 지난달 21일이었다. 신고를 하자마자 고창군청은 예방 차원에서 바로 오리들을 살처분했다. AI 때문에 당분간은 새로 오리를 키울 수도 없는 처지다.

 “자진 신고한 걸 후회도 했지. 그냥 놔뒀으면 다음 날 내다 팔았을 테니까. 하지만 내 자식이 먹을 수도 있는데 양심에 뿔이 나지 않고서야….”

 김씨는 원래 덤프트럭을 운전하다 5년 전 오리 농장을 시작했다. 일가 친척에게서 2억원 빚을 냈다. 4년 전 AI는 넘겼으나 이번엔 무사하지 못했다. 그는 “아직 빚을 다 갚지 못했는데…”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권철암·윤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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