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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김용판, 부끄러움은 없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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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권석천
권석천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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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식 경북대 로스쿨 교수의 인터뷰집 『다른 길이 있다』를 읽었다. 등장 인물들 가운데 특히 내 눈길을 끈 이는 남성패션 월간지 ‘GQ코리아’의 이충걸 편집장이었다. 그는 “제 직업에 가장 중요한 건 개인적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잡지를 만들다 보면 별의별 권세들과 마주하게 돼요…그런 걸 콧등으로 날려버리자면 책이 말하려는 바, 또는 책 자체의 품질이 뛰어나야 해요. 책도 후지게 만들면서….”

 직업적 자존심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 나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노력을 기울인다면 많은 게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다. 경찰은 검사 앞에서, 검사는 판사 앞에서 직업적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수사를 해야 한다. 기자도 다르지 않다. 나는 안일함이나 경솔함 때문에 팩트를 놓치거나, 판단을 그르쳤음을 깨닫게 되거나, 글에 오·탈자가 있을 때 부끄러움을 느낀다.

 지난주 국정원 댓글 사건에 대한 경찰 수사를 축소·은폐한 혐의로 기소된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선고 후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사진들이 인터넷에 떴다. 그는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소감을 밝혔다.

 “진실을 밝혀줌으로써 저와 경찰 가족의 명예를 회복시켜 준 재판부에 감사드립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의 명예가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의 결론은 “공소사실에 관한 검사의 논증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유죄의 확신이 드는 정도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원칙은 판결문에서 여러 차례 반복된다.

 “피고인의 주장이나 변명이 모순되거나 석연치 않은 면이 있는 등 유죄의 의심이 간다고 하더라도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해야….”

 그러나 이번 판결로 대선 직전인 2012년 12월 16일 밤 11시 전격적으로 이뤄진 중간수사결과 발표에 정당성이 부여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국정원 직원의 후보 지지·비방 댓글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중간수사결과는 4개월 후 경찰 스스로에 의해 ‘혐의 있음’으로 뒤집혔다. 판결문도 “분석의 범위와 관련된 쟁점을 분명히 부각시켜 이를 기초로 수사가 확대될 여지가 있음을 밝히는 등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는 방법으로 업무를 처리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김 전 청장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수사의 지휘 책임자로서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는가. ‘오보’가 돼버린 발표에 대한 사회적 책임은 남아 있는 것 아닌가. 한마디라도 국민에 대해 송구함을 나타내야 하는 것 아닌가.

 직업적 자존심에 가장 큰 상처를 입은 건 검찰이다. 핵심 증인인 권은희 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의 진술이 재판부에 의해 배척당하면서 ‘짜맞추기 수사’(새누리당)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어쩌다 “검사의 주장과 논리가 우연적이고 지엽적인 사실의 조각들로 성글게 엮여 그 안에 여러 불일치, 모순, 의문이 있다”는 재판부 지적이 나오게 된 건가. 검사 출신 변호사의 설명이다.

 “기업 사건에선 일부 무죄가 나도 징역형만 나오면 큰 문제가 없다. 검찰이 그런 사건들에 길들여지다 보니, 판사 마음속에 합리적 의심을 불러일으키면 되는 변호사와는 전혀 다른 입장이란 걸 놓친 게 아닌가 싶다.”

 이제 2심이 시작된다. 검찰과 변호인이 다시 유무죄를 놓고 맞붙는다. 검찰은 혐의를 뒷받침할 증거를 내놓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변호인은 검찰 측 증거를 허물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 과정을 거쳐 나온 결과는 존중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판사의 양심을 불신하는 법치주의는 존재할 수 없다.

 다만 사법적 결론과는 별개로 사회적 책임에 대해선, 직업적 자존심 앞에선 부끄러워할 줄 아는 이들이 늘었으면 한다. 그것이 성숙한 공직자, 성숙한 사회의 모습 아닐까. 김 전 청장이 쓴 책의 제목대로 『우리가 모른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권석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