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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염된 NHK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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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NHK의 추락엔 날개가 없다. 신뢰의 상징으로 불렸던 일본의 공영방송 NHK가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지난달 25일 취임 기자회견에서 “위안부는 어느 나라에도 있었다” 등의 망언 시리즈를 쏟아낸 모미이 가쓰토 회장에 이어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경영위원회 위원들의 ‘자질 부족’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마이니치(每日)신문은 5일 하세가와 미치코(長谷川三千子·67) 사이타마(埼玉)대 명예교수가 1993년 아사히 신문사에서 권총으로 자살한 우익단체 간부의 죽음을 예찬하는 글을 지난해 말 기고한 사실이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그는 일본 최대의 우익단체 ‘일본회의’의 대표위원으로 지난해 11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에 의해 NHK의 신임 경영위원으로 임명됐다.

 언론기관을 총기로 위협한 것은 언급하지 않은 채 정부에 의해 공식 ‘우익단체’로 지정된 조직의 간부가 권총으로 자살한 것을 예찬한 것이다. 노무라는 자신이 이끌던 우익단체를 야유하는 내용의 주간지(주간 아사히)의 삽화에 불만을 품고 아사히의 고위 인사들과 면담 중 권총으로 자살했다.

 이에 앞서 역시 아베에 의해 경영위원이 된 소설가 햐쿠타 나오키(百田尙樹)도 지난 3일 “난징(南京)대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해 물의를 일으켰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50년에 설립된 NHK는 중립적 보도를 관철해 왔다. 국가가 운영하는 국영방송이 아니라 수입의 97%를 시청자의 수신료에 의존하는 공영방송으로서 권력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다. 뉴스도 사실관계에 입각한 내용으로만 채웠다. 이런 신뢰를 바탕으로 ‘프로젝트 X’ ‘연말 가요홍백전’ ‘프로페셔널~직업의 유의(流儀)’ 등의 인기와 품격을 갖춘 콘텐트를 생산해 왔다.

 NHK의 공정성이 흔들린 최초의 사건은 공교롭게도 2001년 당시 관방부 장관이던 아베에 의해 촉발됐다. 위안부 문제를 다룬 특집 프로그램이 방영되기 직전 아베가 NHK 간부를 만나 “공정하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보도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졌다. 말이 ‘공정’이지 일본 내 보수세력의 주장을 담으라고 압력을 가한 것이다. 당시 에비사와 가쓰지(海老澤勝二) 회장은 결국 프로그램 내용을 뒤바꿨다. 이 문제는 시민단체의 반발로 이어졌지만 자민당 정권 내에서 묵살됐다.

 이후 NHK는 제자리를 되찾는 듯했다. 2011년 취임한 마스모토 다다유키(松本正之) 회장은 후쿠시마(福島) 제1원전 사고 이후 원전의 위험성을 반복해 강조하고, 과거 일본이 일으킨 전쟁을 자성하는 대형 시리즈 ‘일본인은 왜 전쟁으로 치달았나’를 내놓으며 사회적 공감을 얻었다.

 그러나 아베 정권 출범 이후 상황이 180도 뒤바뀌었다. 취임 전부터 NHK에 불만이 많던 아베는 회장을 갈아치우기 위해 신임 경영위원 5명 중 4명을 자신의 측근으로 교체했다. NHK 회장은 전체 경영위원 12명에 의해 선출되며 9명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아베가 내보낸 경영위원은 말하자면 회장을 갈아치우기 위한 선발대였던 셈이다. 그러다 보니 자질이 부족한 인사들을 검증 없이 NHK에 보내고 말았다. 아베의 욕심에 의한 ‘NHK 2차 위기’다.

 2001년부터 7년간 NHK 경영위원이었던 고바야시 미도리(小林綠) 국립음대 명예교수는 “(정부의 인사 개입으로) ‘여러분의 NHK’가 아니라 ‘아베님의 NHK’가 돼버릴 것”이라고 우려했다.

 전직 NHK 기자인 가와사키 야스시 스기야마 여학원 전 교수는 “NHK 현장은 회장이나 경영위원의 생각에 따라 프로그램을 만드는 경향이 있어 이대로 가면 아베 총리의 폭주를 허용하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NHK 추락에 날개가 없는 이유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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