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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6사장 김일성의 부하들|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제자=김홍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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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제6사장 김일성은 죽고 이 세상에 없다. 동만 특위의 오성륜 등의 주동요로 발족했던「재만한인조국광복회」의 지방조직(장백현 및 인접 국내)을 담당했고 나아가 그 조직의 호응으로 보천보를 습격했던 제6사장 김일성은 1937년11월13일에 죽은 것이다. 그는 본명 김성주, 나이 36세 함남출신, 「모스크바」공산대학을 나온 사람이었다.

<이도일씨 집서 식객 노릇>
그가 죽자 1백명 내지 1백50명 가량의 그의 부하들은 어찌되었던가. 제6사 조직과장 이었던 권창욱(본명 권영성·당시 34세·함북경성 출신) 동 청년과장 장진열(본명 장경수·24세·함북경성 출신) 동 제7단 모 연대장 지태환(본명 지인환·36세·함남정평출신) 동 정치공작원 서응진(본명 서인홍·32세·노령 이만 출신) 동 보위지 정치책 마동희(본명 마옥준·26세·함남 갑산 출신) 동 제7단 통신대장 조병희(42세·충북제천 출신) 동 정치공작원 황금옥(본명 황남순·23세·강원도 평해 출신·권창욱의 처) 동 정치공작원 박녹금(본명 박영희·27세·함북경성 출신) 등등은 혜산 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권창욱·지태환·서응진 등은 사형되었고 마동희는 후두암에 걸려 있어 혜산서 유치장에서 죽었으며 나머지는 각각 유기징역을 살았다.
황금옥이란 여자는 1935년 봄에 김일성 부대에 납치되어 가서 세뇌교육을 받고 정치공작원이 되어 활약하다가 권창욱과 부부가 된 여자다. 이밖에도 제6사 대원으로써 그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으론 제6사 참모장 허모, 부관장 고모, 부관 김주현, 연장 김동학, 제4연장 오중치 대원 김윤덕·최일형·김승남·이동걸(제6사가 도강할 때 뗏목을 준비했던 사람·체포되어 사형), 특무대원 이동학·김운신·이봉록 등등이 있었다. 이들 이름은 혜산사건에 체포된 자들을 통해 확인된 것이다.
그런데 죽은 제6사장 김일성의 부하 1백명 내지 1백50명중에는 북한의 김성주와 그의 동생 김영주가 끼어 있었다는 사실이 있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이 해서 확인된다. 안도현 치안대장에 이도선(경좌)이란 한인이 있었다. 이 사람은 본 연재 3회의 증인 이도일씨의 동생인데 이른바 공비도벌에 큰 활약을 했던 사람이다. 1937년 초에 이도선은 공비토벌에 나갔다가 한 소년을 체포해 왔다. 이들은 김영주. 부모와 사별한 데다가 가운데형 김철주도 일찍 죽고 사고 무친한 만주 땅에서 의지할 데는 없고 해서 큰형 김성주를 따라 김일성 부대에서 소년대원으로 있었다는 것이었다. 마침 이도선의 형 이도일씨는 안도현의 조선인회 회장으로 있었는데 이 사람은 전에 무송에서 살 때 김성주·영주의 아버지와 친구사이였다.

<김영주, 일인상점에 취직>
그렇지 않아도 조선인회에서는 체포 또는 투항한 한인들을 인수하여 안전정착을 도모해 주는 일을 맡고 있을 때라 이도일씨는 친구의 나이 어린 아들 김영주를 불쌍타 하여 자기 집에 두었었다. 이도일씨의 아들 이벽오씨(51·용산 거주)도 김영주와 같이 몇 해를 한 집에서 살았음을 증언했다.
이벽오씨는 김영주가 자기보다는 몇 살 위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측 발표에 따르면 김영주는 지금 51세로 되어 있으며 그의 해방 전 경력에 관해서 그들은 확실한 것을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김영주는 이도일씨 집에서 살다가 도시에 나가 일해 보고 싶다 해서 신경의 일인상점에 취직해 갔었다. 김영주가 1946년10월께 평양의 김성주 집에 한 식구로 들어왔을 때 그 집의 식모로 일하고 있었던 일인 소림화자(47·동경군 거주)란 여자는 김영주가 어떻게도 일본말을 잘하는지 일본사람인줄 착각할 정도였다고 매일신문사 발행(1970년) 「재외방인 인상기록」이란 책속 에 기록하고 있다. 일본사람 상점에서 몇 해를 일했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김영주를 붙잡았던 이도선은 1937년4월24일 안도현 금창 부근 밀림지대에서 최현 부대(죽기 전의 사람)와 교전하다가 중상을 입고 부하로 하여금 자기의 머리를 쏘게 하여 죽었다.

<김성주 등 20명 소로 도주>
제6사 대원들은 죽은 김일성의 대를 이어 승명한 김일성(소련에서 파견되어 왔었다)의 지휘하에 들어가서 1940년12월께까지 싸우는 사이에 그 대부분은 사살·체포·투항되고 약20명 정도가 살아남아서 소련으로 도주했었다. 그들 중 또 몇 명이나 해방 후에 소군과 함께 나왔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분명한 것은 김성주가 따라나왔다는 사실이다. 또한 사람 김소좌(북한에 살아 있을 것이므로 가명으로 한다)란 만년소좌가 있었다. 북한에는 소위 만주「빨치산」출신이라는 만년 소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언제나 소좌 계급을 달고 놀고먹는 사람들이다.
무식해서 아무 보직도 없이 그냥 선전용 장식품처럼 되어 있었는데 중앙일보『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속「내가 아는 박태영」의 필자였던 박갑동씨가 평양에 있을 때 이들과 사귀었다. 김소좌는 함경도 산문지대 사람으로 약초를 캐어 생계를 잇느라고 만주쪽 산중을 돌아다니다가 김일성 부대에 납치되어 대원이 되었던 사람이다. 그는 보천벽 습격에 참가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최용건 부대의 나팔수 출신인 또 하나의 만년 소좌를 늘 부러워하고 있었다. 「저 동무는 직계 상부가 있어서 좋겠다」는 푸념이었다. 사연을 알아보니 김성주는 보천벽 습격 때의 김일성이 아니라서 자기에게는 직계상부가 없어 외롭다는 것이었다. 이래서 박갑동씨는 보천벽 습격의 김일성은 죽고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눈치챘다고 한다.
만년 소좌들은 대체로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이 없었는데 어쩌다가 튀어나온 말이었다 한다.
죽은 김일성이 박달·박금철 등의 한인민족 해방동명을 통해 국내와 연결을 맺었을 때의 그의 부하들은 아직도 갑산·혜산 지대에 더러 남아 있을 것이다. 혜산 사건이 터지자 요리조리 피해 다니다 끝내 최령 경부의 고춧가루 세례를 받고 붙잡혔던 박달(본명 박문상·29세)은 해방되어 출옥한 이래 병석에 있다가 1960년4월1일에 죽었다고 북한이 보도했다. 박금철은 숙청되어 소식을 알 수 없다. 이 두 사람을 죽은 제6사장 김일성과 접선시켰던 이제순(본명 이동석·사건당시 29세·함북 길주 출신·제6사 한만연락책)도 혜산 사건으로 사형되였다. 그는 장백현 이십도구에 살다가 1936년9월 하순 김일성 부대에 납치되어 약20일간 세뇌교양을 받고 도주를 가장, 귀가하여 정치공작원 노릇을 했던 사람이다.

<"난 직계상부가 없어" 푸념>
또 박금철과 같이 무기징역을 살다가 해방되어 출옥했던 이용술(본명 이경봉·29세·갑산 출신) 이주흥(35세·갑산 출신) 김성연(본명 김철억·32세) 또 제6사의 보천벽까지의 길 안내를 맡았던 천봉순이란 사람도 있었는데 이들은 이북에서 지금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밖에도 1백60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유기징역을 살았는데 이들의 소식도 알 수 없다. 남한에 있는 사람은 혹 없을는지 필자는 이들의 행방을 수소문하고있다.
특히 혜산 사건 피의자들의 재판에 관여했던 향천원심 검사의 서기였던 함흥 고보 출신 이영진의 소식을 알고 싶다. 이 사람은 피의자 심문조서를 면밀히 검토했던 사람이다. 그 심문조서 속에는 제6사장 김일성의 신원에 대해 아주 자상한 기록이 남아 있다. 북한은 이 조서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영원히 공개하지 못할 것이다.
혜산서의 경부였던 최령은 죽었고 그밖에도 한인 형사들이 있었다 한다. 도 경찰부 고등과에도 한인들이 있었다. 이러한 당시의 사건내용에 대해 조금이라도 견문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증언을 제공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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