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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공산주의는 왜 비인간적인가|대표집필 김성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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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우선 공산주의란 무엇이냐? 인간의 기본권이 생명권·재산소유권, 그리고 행복추구권이라고 한다면 공산주의는 그것을 모두 부정한다. 사람이 산다고 하는 것은 그 개인적 생을 위하는 데 있지 않고 당과 당의 영도자를 위하는데 있고 또 자기 자신을 위한 여하한 종류의 재산도 소유할 수 없으며 결국엔 그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일까지 버려야 하는데 있다.
말하자면 당의 존재가 앞서고 개인은 당에 예속되는 것이요, 따라서 개성의 창의성도 무시되든지 혹은 당의 지도이념에 따라서 좌우되든지 하게 된다.

<「삶」보다「당」우위>
공산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특색은 개성의 자유를 말살하는데 있다. 말인즉 피압박 계급의 자유요, 무산자의 자유라고 하지만 일단 당의 체제가 완비되고 권력을 잡게되면 모든 사람의 여하한 자유라도 억압하고 만다. 의식주의 자유가 없고 사상의 자유가 없으며 개인적 의지와 사고에도 자유가 없는 곳이 공산주의 사회다. 인간은 마치 살아있는 도구와 같게 된다.
이상과 같은 점에서 보면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에서 구별되는 것이다. 전자에 있어서는 개성의 자유나 사회의 복리를 해치지 않는 한도 내에선 인정되고 개인의 창의성도 용허되기 때문이다. 지금의 영국이나 서독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자유라든지 창의성을 포함한 인간의 기본권이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또는 사회주의 국가에는 사회 여론이 지배되고 있지만 공산국가에는 사회여론보다 당의 여론, 당의 여론보다 영도자의 자의가 지배적이 되어있다. 그 자의는 항상 폭력을 수반해서 실천되는 것이다.
또 사회주의 국가는 전 국민의 복지를 지향하고 있지만 공산주의 국가는 언제나 계급 투쟁을 앞세우고「프롤레타리아」의 복지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말은 한 계급「프롤레타리아」의 낙원 건설이라고 하지만 공산체제 하에선「부르좌지」고「프롤레타리아」고 논할 것 없이 모두 독재자의 꼭두각시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형편은 물론 초기 공산국가에서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지금은 소련이나 동구제국의 형편은 많이 달라진 데가 있다.「유고슬라비아」같은 데는 자가용차를 갖는다든지「아파트」·별장 같은 건물도 소유할 수 있으며 소규모의「레스토랑」도 가질 수가 있다.

<다소 서구화된 소>
소련도「스탈린」사대와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지금은 희랍정구도 인정되고 어느 정도의 개인의 소유권도 허락되며 또 학생들의 불평도 곧 잘 나타낼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다 아는바와 같이「솔제니친」의 추방 같은 것도 어느 정도의 사상의 자유가 허락된 거라고 본다. 다만 국제적으로 유명한 인사에 대한 탄압과 무명의 젊은 자유주의자에 대한 억압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공산주의는 왜 일어났는가? 이것은 공산주의의 역사관에 기인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산주의의 원조가 되는「마르크스」나「엥겔스」는 모두 영국의 자본주의를 체험한 사람들이다.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소수인의 수중으로 자본이 집중되고 그 반비례로「프롤레타리아」의 수가 증가되어 후자의 혁명은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결정론적 역사관에서 공산주의 사장이 생긴 것이다. 물질이 의식의 토대요, 경제적 변동과 계급투쟁이 역사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유물사관이 공산주의의 인생관이요, 세계관인 것이다.
그런데「마르크스」의 예언대로 본다면 서구의 자본주의 사회는 공산주의 사회가 되었어야 했는데 왜 그렇게 안되었던가? 이와 반대로 자본주의가 발달하지 못한「러시아」나 중국 기타 동남아 여러 지역에 공산국가가 생기게 된 것은 무슨 이유인가? 여기서 우리는 공산주의가 일어나고 아니 일어나게 되는 한가지 이유를 알 수 있으리라고 본다.
즉 서구 자본주의 사회는 개방사회다. 개방사회의 특색의 하나는 합리주의가 통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그 자체의 모순을 곧 알게 뒤고 스스로의 힘으로 개혁해 나가기 때문에「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이 미연에 방지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러시아」나 동남아는 자본주의가 발달하지 않은 폐쇄사회였다.
폐쇄사회의 특성은 전제와 비합리주의 정신이 충만하고 빈부의 차이가 심한 곳이다. 계급과 계급간에는 마치 인도의 사성제도와 같아서 상호간의 교류도 없고 마치 한 나라 사람이면서 서로 넘을 수 없는 이방인과 같았다. 서구에 가까운「러시아」가 바로 그런 나라였다. 그리하여「마르크스」주의는「러시아」에서 발을 붙이게 된 것이다.

<북한만이 폐쇄적>
「토인비」는 서구가 기독교 사회인데도 불구하고 기독교식으로 생활하지 못했기 때문에「마르크스」와 같은 이단자가 나왔다고 하였다. 공산주의는 기독교 사회의 이단인 것이다. 그것이 본 고장에선 쫓겨나서「러시아」에서 발을 붙이고 자라나서 다시 서구에 대항해 온다고 하였다. 이로써 보면 공산주의는 상하·빈부의 계급적 대립이 많은 봉건적 사회에 번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동남아지역이나「러시아」가 바로 그러한 곳이었다. 이게 서구의 서자인 공산주의는「러시아」에서 적자가 된 셈이다.
특히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지배하에 있었던 지역에서 공산주의는 약소민족과 피압박 계급의 해방자로 자처하였다.「스탈린」자신이「프랑스」혁명의 계승자라고 하면서 해방자라고 스스로를 선전하였다. 상하·빈부의 계급적 대립으로 민족감정이 통일되어 있지 못한 지역에서 공산주의는 마치 복음과 같이 들리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대신에 세계공산화를 계획하였던 것이다. 일찌기 「레닌」은「아시아」로 눈을 돌려라. 그러면 우리는 동양으로써 서양을 파괴하리라』고 하였는데 이 말을「지노비에프」가 풀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러시아」가「아시아」에 손을 내미는 것은…서구의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를 파괴할 수가 있는 8억의 인구가 탐이 나서다』라고.
그러면 공산주의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흑자는 생활수준이 높아지면 공산주의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보다도 빈부의 격차가 없어져야된다. 가난하다고 반드시 공산주의가 생기고 부해졌다고 아니 생기는 것은 아니다.
공산주의는 우선 불평에서 생기고 불평은 빈부의 격차에서 생기기 쉽다. 너는 뭔데 잘먹고 잘살며, 나는 왜 못 먹고 못사느냐? 이런 불평만 없으면, 즉 비교적 모두 고르게 산다면 불평이 있을 수 없고 불평이 없는 곳에 공산주의는 싹트지 못한다.
균형 있는 경제적 성장과 계층의 격차가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공산주의를 막는 길이 될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를 해소시키는 길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공산주의를 막을 방책만 강구하면 공산주의는 언제나 내습할 것이나 이를 해소시키면 공산주의는 영영 싹트지 못하게 될 것이다.
또 한가지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공산주의는 폐쇄된 사회에서 자라고 발전하게 되는 것이므로 이것을 막으려면 개방사회 생활을 해야 될 것이다. 폐쇄사회에서 공산주의를 막아보겠다는 것은 마치 섶(신)을 지고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거나 다름없다. 지금 북한을 제외한 기타의 공산국가는 차차 개방적 사회정책을 취하고있기 때문에 1917년대의 공산주의는 차차 변모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폐쇄사회를 그대로 유지하고 자유·민주세계와는 절대로 접촉을 못하게 하고있어 공산주의 초기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동구나 소련까지 서구의 자유의 물결이 스며들어 점진적으로 변해가고 있는데 북한만이 이에서 제외되고 있다.

<자유화 스민 동구>
상하·빈부의 계층을 없애는 방법은 중산층을 육성하여 이를 확대시키는 길이다. 영국과 같이 중산층이 자유롭게 성장하여 상류계급을 흡수하고 하류계급을 흡수해서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공산주의를 싹트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중산층이 많은 나라에 공산주의가 일어나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지금 서구의 공산주의자도 소련이나 중공의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기성제도에 항거하는 주의에 뜻이 있는 것이다.「파리」학생혁명 때에 그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공산주의의 저항정신을 벌이는 것뿐이라고 하였다.
서구에서는 공산주의 자체로서는 무의미하게 되어가고 있다.
중산층이 제일 많은 영국에는 국회의원 중 공산당은 한사람도 없다. 상류를 중산층으로 내려놓고 하류를 중산층으로 올려놓았으니 공산주의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 공산주의는 왜 비인도적인가? 공산주의에도 그 나름의 인도가 있지 않았겠는가?「마르크스」가 『배고픈 자에게 빵을 주고…』할 때는 낭만적인 점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인정도 있고 이상도 있었을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공산주의자는 철두철미하게 유물론자다. 인간을 정신적 존재가 아니고 물질적 존재로 보았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빵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모든 정신적인 문화는 2차로 여겼다. 물질적 욕구가 정신적 욕구를 능가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유물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모든 기성문화를 파괴하는 것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전통적 문화가 살아있는 한 유물사상은 실현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공산주의자는 우선 모든 것을 파괴하였다. 재래의 문화를 봉건적이니, 「부르좌」적이니 하면서 거부하였다. 그 거부하는 방식이 지극히 과격 적이요, 무자비하였다. 반동분자라는 이름 하에서 우선 잡아죽이는 것이었다.
다음은 강제 노동 에 수용하든지 먼 지역으로 유배시키든지 하였다. 재산을 몰수하고 가족제도를 파괴하였다.

<당 위해 부모 버려>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나자 여성해방이라는 이름으로 신혼생활을 했다. 어린애가 생기면 서로 누구를 닮았느냐를 주의하였다. 해방 뒤 소련인 가족이 북한에 정주 했을 때에 한국인이 어린애를 귀엽다고 보면 소련인은 싫어했는데 그것은 누구를 닮았느냐를 알아보기 위하는 것으로 오인하였기 때문이었다.
공산주의자에게는 전통적 도덕이 필요 없었다. 그들의 도덕이란 오직 당과 영도자의 명령을 복종하는 것으로 최상의 도덕률을 삼았다.「칸트」가 말한 자율적 도덕적 양심은 깡그리 버리고 당의 이론에 무조건 따라야 되었다. 거기는 개성의 인격이 없다. 자기 자신의 인격을 살린다는 것은 용서되지 않는다.
따라서 개인의 자유의사에 따라 직업의 선택도 할 수 없고 당의 지시에 의해서 마치 기계의 부속품과 같이 이곳 저곳으로 배정되는 물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산주의에 철저히 적응하는 수밖에는 달리 살아갈 도리가 없다. 타율적이건 자율적이건 세뇌작업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었다. 자기를 상실한 괴뢰인간이 되어야 편안히 살수 있다. 자기의 감정이나 이성 또는 의욕이나 이상을 완전히 포기할 때에 전통적인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 인간에게는 부모나 친구가 없고 다만 상대할 수 있는 무감각한 인형인간만이 있을 뿐이다. 당 이념에 철저한 인간만이 벼슬자리에 오를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 부모도 해치고 친척과 친구도 모함하는 것이다. 여기에 공산주의의 비인간적인 점이 있는 것이다.
처음엔『주린 자에 빵을 주고…』상당히 인간적이고 인도적인 것 같았으나 결국엔 독재와 폭력으로 인간의 기본권을 무시한 결과 비인간적이고 비인도적이 되고 말았다. 소련이나 중공 또는 북한에서 얼마나 많은 잔학행위가 있었던가를 미루어보면 알 수 있다.

<공산주의 막는 길>
인간을 모두 권력유지와 생산증가의 도구화해 버리고 결국에 인간을 비인간화해 버리는 것이 공산주의인 것이었다. 서양 중세시대 종교로 인한 인간소외에서「르네상스」이후 기계문명으로 나타난 인간소외를 거쳐서 공산주의의 비인도적 인간소외에 이른 것이다.
결론적으로 공산주의를 해소시키는 길은 생활의 다원화다. 지금 소련이나 동구는 서구의 다원적 생활양식을 차차 본 받고 있다. 한가지 예만 들어보기로 한다. 소련은 종교는 아편이라고 전적으로 폐지했었으나「히틀러」의 침공이 있은 후에「스탈린」은 신앙의 자유를 허용함으로써 신자들의 애국심을 샀다.
그 뒤로 소련인의 종교적 정열은 갑자기 일어나기 시작해서 지금은 5천만 명이나 되고 공산 청년들 중에는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는가 하면 유아세례도 받고있는 형편이다.
2차 대전 후 서구에 출전한 병사들에 의해서 공산주의보다 자유민주주의가 더 좋다는 것이 선전되자「스탈린」격하운동도 일어났고 지금엔 어쩔 수 없이 생활의 다원화가 점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는 아주 반대로 북한은 공산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 생활의 일원화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의 세계적 대세가 자유화에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공산주의는 이미 매력 있는 처녀는 아닌 것이다.
대표집필 김성식
참석자(무순)
고영복(서울대문리대교수·사회학) 임원택(서울대법대교수·경제학) 김여수(성균관대교수·철학) 이면석(조흥은행 감사) 김성식(경희대교수·역사학)
주제「공산주의는 왜 비인간적인가」
일시 1974년 6월 17일
장소 중앙일보사 회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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