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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대란, 누가 누굴 징벌한다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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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정선구 기자 중앙일보 시사매거진제작담당
정선구
경제부장

기자들은 독자 입장에서 기사를 쓰도록 훈련을 받는다. 가령 부가세율이 인하된다고 치자. 그러면 기사 앞 부분은 이렇게 장식된다. ‘앞으로 가계 부담이 덜어질 전망이다. 자영업자들은 세 부담이 준다. 일시적으로 구매력이 늘어 경기는 반짝 활성화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부가세율을 현행 10%에서 5%로 인하…’. 그런데 정부 입장에서 기사가 작성된다면 첫 문장부터 달라진다. ‘정부는 부가세율을 현행 10%에서 5%로 낮춘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조세수입은 당장 큰 폭으로 줄어들…’. 이처럼 어디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형태가 확 바뀐다.

 이번 카드대란 때 현오석 경제부총리의 발언이 공분을 샀다. 그는 “어리석은 사람은 무슨 일이 터지면 책임을 따지고 걱정만 하는데, 현명한 사람은 이를 계기로 이런 일이 이어지지 않도록 한다”고 말했다. 문제가 불거지자 “금융거래 때 좀 더 신중하자는 취지”라면서 사과문을 냈다. 논어에 나온 글을 인용하다가 화를 자초했다고 한다. “현명한 사람의 입은 마음에 있고,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입에 있다”는 솔로몬 왕의 지혜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정부의 첫 대책 발표는 또 어땠나. 금융사에 대한 무자비한 제재부터 앞세웠다. 이런 사태로 금융사가 그동안 냈던 벌금은 600만원. 과태료 수준에 불과했다. 정부는 이를 크게 올려 매출액의 1%까지 ‘징벌적 과징금’을 매기겠다고 했다. 그러나 현 부총리의 실언이나 정부의 과징금 확대 모두 자기들 입장에서 본 것이다. 만약 소비자, 즉 국민 입장에서 봤다면 이런 방안들이 나왔을 것이다.

 첫째, 과징금을 고객에게 돌려준다. 정부 발표대로라면 매출액의 1%는 엄청난 돈이다. 한 은행의 매출이 20조원이라면 2000억원까지 벌금을 거두겠다는 것이다. 사실상 무제한이다. 그리고 이 돈은 정부 일반회계 잡수입으로 잡힌다. 그것도 ‘징벌’이란 이름으로. 그러나 누가 누굴 징벌하는가. 피해자는 정부가 아니라 소비자인 것을. 징벌하는 주체는 국민이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엄청난 과징금이 부과된다면 그 돈은 소비자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 이는 공정거래위원회 과징금과는 다르다. 이 돈 역시 국고로 들어가지만 기업들의 담합행위를 제재하는 돈이다.

 PL법(제조물책임법)이란 게 있다. 제품 안전성이 미흡해 소비자가 피해를 보았을 경우 제조 기업이 최종 피해자, 즉 소비자에게 배상하도록 하는 법이다. 고객 유치를 위해 금융사에서 내놓는 것도 금융상품이다. 그래서 PL법을 제조업에만 국한시킬 필요는 없다. 이 경우 소송은 하지 않는다는 전제조건까지 붙으면 더 좋겠다. 소비자는 보상받아 좋고, 금융사는 송사에 휘말리지 않아서 좋다. 단, 누구에게 직접적인 피해보상이 돌아가게 될지 애매한 부분이 있다. 신속하게 피해 입증이 불가능한 면도 있다. 그 경우 가칭 ‘정보유출피해 구제기금’ 같은 것을 만들면 어떨까. 기금 운용은 공신력 있는 곳에서 하되, 확실히 드러난 피해는 개별적으로 신속 보상해 주고, 애매한 부분은 직접 보상 없이 개인정보 보호사업에 쓰면 된다.

 둘째, 개인정보를 의무적으로 암호화한다. 일반기업은 잘 돼 있는데 금융사엔 허술한 부분이다. 금융당국을 포함해 금융권은 암호화에 무관심한 게 현실이다. 법적 강제요건도 없다. 암호화엔 당연히 큰돈이 들어간다. 게다가 고객이 수만·수백만 정도가 아닌 수천만 명이다. 이 엄청난 고객 수를 감당할 암호화 소프트웨어가 가능할지도 의문이다. 그래서 정확성을 담보하기 힘들다는 게 금융사 입장이다. 또 암호화하면 수시로 필요한 자료를 뽑는 시간이 훨씬 길어지는 점도 금융사가 꺼리는 부분이다. 속도전에서 매우 불리하다는 주장이다. 현재 비교적 규모가 작은 전북은행만이 암호화에 충실할 뿐이다. 하지만 개인정보보호법상 지난해부터 주민번호도 암호화하도록 돼 있다. 개인정보는 시간과 돈이 아무리 들어도 꼭 보호해야 할 사안이다. 정부와 금융사가 국민과 고객 입장에서 생각했더라면 카드대란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뒤늦게 외양간 고치는 시간과 비용이 더 들고 있지 않나. 어리석은 사람은 물을 퍼내고 현명한 사람은 고기를 잡는다. 영국 속담이다.

정선구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