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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핍한 시절, 종이가 있어 그들은 그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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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이중섭의 ‘세 사람’. 미술가들에게 가장 가까운 재료, 종이 위에 그린 그림이다. [사진 갤러리현대]

“손이 마려워서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서예가 여초(如初) 김응현(1927∼2007)을 두고 부인이 이렇게 말한 일이 있다. 여초는 72세에 교통사고로 오른 손목을 다친 뒤 왼손으로 쓴 글을 모아 ‘좌수전(左手展)’을 열기도 했다. 그렇게 어디든 쓰고 그려야 하는 것이 예술가라면, 6·25전쟁으로 모든 것이 부족했던 시절에 재료 구하기도 어려웠던 우리 근현대 예술가들은 비극적이었다.

 가난했던 화가 박수근(1914∼65)은 미국의 컬렉터 마가렛 밀러 부인에게 그림값 50달러 대신 물감을 사서 보내달라 편지했을 정도다. 당시 50달러는 쌀 서너 가마 값이었다. 그런가 하면 이중섭(1916∼56)은 평생 캔버스에 그린 작품을 한 점도 남기지 못했다. 아틀리에에서 이젤에 캔버스를 걸어놓고 그림 그리는 삶이 그에겐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노상 종이, 그것도 없으면 담배갑 은박지에라도 그렸다.

 이중섭이 그렇게 그린 ‘세 사람’(1942∼45)은 작고 고요한 그림이다. 웅크려 앉아, 혹은 팔 베고 누워 낮잠 자는 두 사내아이와 뒤에 엎드린 사람은 가족들일 터다. 연필선으로 만든 어두운 화면은 추억의 한 장면처럼 애잔하다. 가린 얼굴, 감은 눈을 그리며 화가는 그리움으로 먹먹했을 것 같다. 이 종이 작품은 아이들 장난처럼 천진한 이중섭의 그림이 실은 탄탄한 데생력에 기초하고 있음 또한 드러낸다.

 박수근의 ‘모자(젖먹이는 아내)’(1958)는 한국판 성모자상이다. 양반다리를 한 어머니가 만든 안정된 삼각형 구도 안에 젖먹이가 폭 안겨 있다. 유화에서는 화강암을 닮은 질박한 마티에르(재질감)를 살린 이 화가는 가는 연필선만으로도 질량감을 보여주고 있다. 마티에르 없이도 박수근은 박수근이다.

 미술가들의 종이 작품만을 조명하는 전시 ‘종이에 실린 현대작가의 예술혼’이 열린다. 서울 삼청로 갤러리현대 본관과 신관에서 다음달 5일부터다. 총 30명의 151점을 전시한다. 권진규·김종영·김환기·박서보·서세옥·오윤·이우환·이응노·이인성·장욱진·천경자 등 한국 근현대 미술에서 빛나는 이름들이 모였다.

 유화에 비해 부수적인 것, 습작 정도로 취급받아온 게 종이 작업이다. 그러나 종이는 생활고 속에서도 작품활동을 가능케 해 준 재료였다. 조각가들은 인체 크로키를 통해 운동감을 연구했고, 한국화가들은 종이를 뚫거나 이겨 붙여 현대적 추상을 실험했다.

 미술가들의 연구와 고뇌가 종이라는 가장 가까운 재료 위에서 정겹게 펼쳐진다. 모아두니 유난히 얼굴이 많다. 예술의 기본은 결국 사람이다. 자기 얼굴, 아내 얼굴, 남들 얼굴, 함께 시대를 헤쳐온 이들의 얼굴이 몇 개의 선으로, 고운 색으로 살아났다. 종이는 작가들의 또 다른 얼굴, 민낯이었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종이작업은 그 예술가의 내공이 얼마만큼 깊고, 형상력이 뛰어난가를 보여준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예술혼이 담긴 또 다른 예술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이했다. 그림을 보다 보면 ‘이 작가가 이래서 이같은 예술 세계로 나아갔구나’ 싶을 게다”라고 말했다. 전시는 3월 9일까지. 02-2287-3500.

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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