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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비적두목에 권총사들여 약탈일삼던 김성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1931년 2월 오가자에서 돈거둬 달아난 김성주는 중국인 친구 장아청과 동행 이었다.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이 떠난 이들은 소련에 가서 공부할 요량으로 처음엔「하르빈」으로 발을 욺겼었다.
그러나 이들은「하르빈」의 중공당으로 부터 인정을 받을 만한 전력이 없으므로 소련 유학의 추천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소련행 꿈은좌절된 것이다 (북괴측이 김성주가 1931년전에 이미 공청조직자로 활동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거짓말이다).
하는 수 없이 김성주는 장아청과 함께 무송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무송은 장아청의 고향이요, 또 김성주에게도 만주에서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둘은 무송으로 내려가는 길에 오가자에서 약 1백리쯤 떨어진 곳인 공주령에 들러 그 지방에서 비적의 두목으로 이름났던 중국인 조전승을 찾았다.
귄총을 구입하기 위한 교섭 때문이었다.
교섭은 장아청이 했다.

<허물어진 소련행의 꿈>
조전승은 공주령과 장춘의 중간지점인 범가둔이란 곳에 샅고있는 일인 목사로 부터 무기를 살 수 있는「루트」를 갖고 있던 자이다.
목사는 또 관동군 앞잡이로서 비적들에게 무기를 파는 중간업자였다.
관동군에서는 비적들을 길러서 필요할 때에 요긴하게 이용하는 모략공작을 잘 써왔다.
그래서 관동군의 앞잡이 목사와 비적의 두목 조전승 사이에는 늘 연락이 닿고 있었던 것이다.
김성주는 오가자에서 거두어 온 돈으로 조전승을 통해 목사로 부터 권종 몇자루를 샀다. 현물 인수는 범가둔에서 했다.
그것을 갖고 그들이 무송에 내려간 것은 그해 5, 6월께 이다.
장아청과 같이 무송에 나타난 김성주는 권총을 휘두르고 다니면서 약탈의 선두에 나서 큰문제를 일으켰다.
김성주·장아청은 그 지방의 껄렁한 자기 또래의 젊은 것들을 긁어모아 패거리를 지어 중국사람들 집을 털고 다녔다.
그때 김성주는 김일성이란 이름을 썼다.
당시 웬만한 중국 사람들은 대개 집에다 경호용의 총들을 갖고 있었는데 김성주·장아청등은 돌아다니면서 이걸 강탈해 같은 패들끼리 나누어 갖고 무장작당이 이루어지자 다음에는 또 군자금 모집이다 해서 돈을 털고 다니기 시작했다.
무송일대의 중국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리가 없다.
한국 놈 김일성(김성주) 일당의 약탈 때문에 못 살겠다는 소리가 비등해졌다.
한·중 양민쪽 사이에 큰금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1931년과 1932년사이의 겨울내내 김성주일당의 행패는 그치지 않았다.
그때 무송에는 장철호라는 조선혁명군 중대장을 하다가 그만 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이사람이 김성주일당의 행패를 퇴치하지 않고서는 무송일대에서 한인들이 배겨나기 어렵다고 판단, 조선혁명군 본부가 있는 흥경현 주청문으로 급히 기별하러 갔다.
그때 조선혁명군의 총사령은 양세봉으로 바뀌어 있었다.
1932년 1월19일에 조선혁명군 총사령으로 있던 김보안 등이 한인밀정의 통보로 일제 경찰에 체포된 불행이 있어 그 후임으로 양세봉이 총사령으로 취임했던 때이다.
장철호는 양사령에게 가서 무송일대의 실정을 보고하고 김성주일당울 퇴치할 것을 요청했다.

<"김성주 항패로 못살겠다">
양세봉 사령은 흥경과 무송의 중간지대인 유하현 삼원포의 국민부 총관이었던 이병근 (본연재 5회의 증언자 이시찬씨의 부친) 에게 편지를 보내 이병근 총관밑에 있는 조선혁명군 소대장 고동뇌로 하여금 김성주일당을 퇴치토록 하라 했다.
당시는 만주사변 (1931년 9월18일)후라서 도처에 일군들이 마음놓고 들락거릴 때라 한인사회는 불안하기 그지 없었다.
이병근은 양사령에게 유하현 자채가 일군들 때문에 불안하니 무장병력을 무송에까지 보내면 유하현의 한인사회 보호가 문제라면서 난색을 표하는 답장을 보냈다.
그랬더니 양사령은 군인은 상부의 멍령에 따라야 한다면서 그대로 집행토록 하라는 지시를 재차 내렸다.
고동뇌 소대장 (황해도사람)은 권총으로 무장한 9명의 대원을 데리고 무송으로 떠났다.
그 속에는 이병근의 아들 이시찬씨의 화흥 중학동창이었던 김문빈도 있었다.
김문빈은 함남사랍으로 고향에 가족을 둔채 주청문에 공부하러 왔던 사람이었다.
고동뇌 소대장 일행은 먼길을 오느라고 무송에 도착했을 때엔 매우 지쳐 있었다.
도착한 첫날밤은 우선 푹 쉬기로 했다.
일행이 모두 한방에서 베개밑에 권총을 깔고 깊은잠에 들었던 것이다.
날이 새면 김성주일당을 찾아나서 그들을 무장해제해 다시는 행패를 부리지 못하도록 할참이었다.
한·중 양민족의 친화를 해치는 일을 막고 그로써 한인사회의 안전을 도모함과 동시에 젊은 것들이 철없이 비적떼 노릇이나 하고 다니는 것을 응징할 생각이었다.

<권총 모조리 뺏어 도주>
그러나 불행은 고동뇌 소대장 일행이 무송에 도착한 것을 김성주패들이 탐지한데 있었다. 김성주 패들은 한밤중에 곤히 잠든 고동뇌 일행의 잠자리를 습격해 10명을 몰살하고 만 것이다.
우리 독립군인 조선혁명군의 귀중한 병력의 한부분이 치안확보차 출동했다가 김성주에 의해 살해된 끔찍한 사건이었다.
김성주 일당은 베개밑 권총들을 모조리 거두어 달아났다.
이 사건을 저지르고 나서 김성주 일당은 무송지대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1932년 2월께의 일이다.
그후 이해 여름까지의 김성주의 발자취를 말해주는 자료도 증인도 없다.
그런데 이 시기, 즉 김성주가 1931년 2월에 오가자를 떠나「하르빈」을 거쳐 범가둔에서 권총을 사서 무송에 나타났다가 고동뇌 등을 살해하고 달아난 1932년 2월까지의 김성주의 행각이 북한의 역사책에서는 완전히 딴판으로 되어 있다.
무송아닌 딴 지방에서 무슨 조직사업을 했다느니, 비적의 두목을 통해 산 권총을 무슨 아버지가 쓰던 것을 어머니로 부터 두자루를 물려 받았다느니, 중국인 집을 털거나 심지어는 우리 독립군을 몰살시키고 뺏은 무기를 그 무슨 군용「트럭」을 습격하여 무기를 뺏었다느니 하는 식으로 되어있다.

<"부가 물려준 권총" 이라고>
뿐 아니라 이 시기를 그럴 듯하게 꾸며 넘기기 위해 소설적 장면까지 삽입해 놓고 있다. 더우기 이 시기에 그가 감히 간도지방의 농민의 추수폭동까지 지도했다고도 하고 있으니 이것들은 모두가 전혀 사실과 다른 완전한 창작일 뿐이다.
중공당의 인정을 못 받아 소련으로도 못갔고 하필이면 우리 독립군을 10명이나 참살한 끔찍한 죄과를 감추기 위해서는 엉뚱한 곳에서 활약한 것으로 꾸며놓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김성주가 오가자에 있는 동안 두 세달을 함께 지낸 이선일씨 (서울 영등포 거주)의 김성주 인상을 기록해두자.
김성주는 웃니 (齒) 앞부분의 양쪽 두개가 시꺼멓게 뻗어나온 뻐드렁니여서 보기 흉했다고 한다.
그래서 입을 다물어도 윗 입술이 약간 앞으로 튀어 나온 듯 했다는 것.
그런데 지금의 김성주의 사진을 보면 그렇지가 않다.
이선일씨는 김성주가 이를 새로 해박은 것이 아닌가 싶다고 했는데 그의 기억과 추측은 정확히 맞는다.
1972년 9윌10일자 일본 독매신문의 별책 부록「주간독매」의 북한 특집호 표지에 보면 김성주의 활짝웃는 모습의 천연색 사진이 있다.
거기에 위쪽이 양쪽 두개를 새로 해박아 금으로 들러리를 씌운 것이 잘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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