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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의「서열」의 의미|박갑동<북한문제전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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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아무나라 정계에 있어서도 정계지도자의 서열은 그대로의 의의를 가지는 것이며 그 지도자의 비중을 그대로 표시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특히 공산주의 국가에 있어서는 그 서열이 엄격히 정해져 있어 이 서열에 조금이라도 변동이 있으면 그 지도자의 생사에 직접 관련되는 것 뿐 아니라 정책의 변동을 가져오는 것이 전례로 되어 왔었기 때문에 특히 주목되어 왔던 것이다.
소련혁명기념일인 11월7일의 식전에 매년「모스크바」「크렘린」성 단상에 늘어서는 주석 단의 석순, 그리고 중공의 국경절인 10월1일 북경의 천안문상에 올라서는 주석단의 면모에 세계의 안목이 집중되는 것도 그 석순과 면모에 의하여 소련이나 중공안의 정계의 움직임과 파벌의 소장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소련과 중공은 북괴와 비할 바도 없이 지광물박 할 뿐 아니라 인구도 방대하며 인물도 많으며 그 특성도 각이 각양하여「스탈린」과 모택동이 제아무리 l인 독재를 한다 하여도 독자적인 투쟁경력을 가진 지도자들을 다 배제하고 자기의 비서출신 만으로써는 당파정부를 지도해 나가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소련에서 예를 든다면「스탈린」이 제아무리 자기의 비서인「말렌코프」를 총애하여 자기의 후계자를 시키려 하고 또는 자기와 같은「그루지야」인인「베리야」를 제2인자로 만들어 놓았어도 독·소 전쟁 때 노도와 같이 쳐 밀어 들어오는 독일군에 대하여 투항하지 않고 방대한 군대와 당 간부들을 그대로 이끌고「우크라이나」의 봇나무 숲 속에서 끝까지 싸워 승리를 전취해 낸「우크라이나」당 제1서기「흐루시초프」의 대두를 막아낼 도리가 없었다.
중공에 있어서도 모택동이 제아무리 제1인자로서 명망과 위신이 높다 하여도 유소기나 주덕이나 주은래나 고강이나 진의의 명망도 역시 독자적으로 높았으며 모택동과는 별개의 존재로 되어 있었다.
그들은 다 독자적인 개성과 포부, 그리고 정견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의 파벌을 가지고 있는 지도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서열의 움직임에 의한 부침은 곧 그 나라의 정치에 민감히 반영되어 왔었다.
북괴의 경우에는 어떠하였던가? 북괴의 경우에도 처음에는 개성이 있고 독자적인 정견을 가지며 파벌을 가진 지도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서열의 움직임이 큰 의의를 가지고 있었을 시기가 있었다. 김일성 박헌영 허가이 김두봉 등 4명은 각각 성격과 정견에 차가 있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배후에는 파벌을 가지고 있었다.
김일성은 우리의 동포로서의 민족성이 전혀 없으며 소련과 중공의 이중의 괴뢰로서 파견되어 와서 북한의 최고지위를 얻은 자이며 박헌영은 국내좌익의 대표자이며 허가이는「스탈린」이 김일성을 보호하며 동시에 감시하여 중공 측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파견한 자이며 김두봉은 중국에 망명간 한인들의 좌익계의 대표자로서 중공의 비호를 받아 온 자였다.
이 자들은 이렇게 그 성격과 배경과 정견·파벌이 달랐기 때문에 그들의 서열과 부침이 북괴의 정치적 움직임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며 권력의 변동을 의미하여 많은 주목을 끌었고 관심을 모았던 것이었다. 이 4사람 가운데 외세의 덕택으로 최고지위를 차지한자인 김일성이 박헌영·허가이·김두봉 등에 대하여 드디어 피의 숙청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허가이를 암살해 놓고는 자살한 것 같이 꾸미고 박헌영은 미국의 간첩이란 누명을 씌워 죽이고 김두봉 노인은 함경북도의 삭북의 땅의 학교 교원으로 추방해 버렸던 것이었다. 계속하여 소련파의 박창옥, 연안파의 최창익 등을 속속 숙청하여 1957년까지에는 박헌영의 남로당계는 물론 소련파·연안파는 다 숙청해 버렸던 것이었다. 당시 김일성 밑에 당은 박금철, 정부는 김일, 군은 김광협이 지도하고 있었다.
박금철은 현재의 평양 김일성의 전대의 김일성의 지도하에서 갑산공작대를 조직하여 1937년 진짜 김일성이 압록강을 건너와서 보천보를 습격할 때 지도를 그려 안내한자이며 김일은 김일성이 중공계의 무장대에서 대대장으로 있을 때 중대장으로 있었던 자이며(박성철은 김일 밑에서 소대장으로 있었다) 김광협은 중공군의 간도군관구 군단장으로 있었던 자였다. 김일성의 직계가 아니며 약간의 파벌을 가지고 있던 박금철과 김광협은 결국 추방당하고 맡았다.
이후로부터는 북괴의 최고간부의 자리를 최용건과 최현을 제외하고는 김일성의 만주시대의 부하 8명이 독점하게 되었다. 즉 김일 박성철 오진우 김동규 서철 한익수 오백룡 임춘추 등이다.
이들 가운데서 김일성의 후계자가 나올 것이 명백한데 우리나라의 일부에서 김일성의 후계자가 그의 실제 김영주라고 본 것은 무근거한 추측이다. 김영주의 전도가 안태하더라도 제2인자로서 최용건이나 강양욱의 지위를 물려받을 정도로 보인다.
전기 8명중 제일 유능한 자가 김일과 임춘추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동란 때 큰 실수를 하여 박헌영·허가이에 의하여 출당 당한 일이 있다. 금일은 군 문화부사령으로서 비행기가 없어 못 싸우겠다고 하여 전선이탈을 하였고 임춘추는 북 강원도 당위원장으로서 우리군대의 진격에 겁을 먹고 자기의 임무를 포기하고 저 혼자 도망쳐 버렸던 것이었다. 다른 간부들 같으면 출당 당하면 그날로 지옥에 떨어질 것인데 김일성의 직계부하이기 때문에 최고간부로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8명에 최용건과 최신의 2명을 합하여 상위10위의 서열을 형성하고 있다. 최용건은 1956년 김일성이 소련과 동「유럽」여행 중 수상대리직을 맡아 소련파 박창옥과 연안파 최창익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를 방어하여 김일성의 지위를 지켜 준 충복의 실속이 있을 뿐만 아니라 야심이 없는 자이기 때문에 명예직으로 부주석으로서 김일성의 다음가는 제2의 서열에 있다. 최현은 낫 놓고「ㄱ」자도 모르는 무식꾼이지만 졸병들과 같이 밥도 먹고 농도 하는 성격이 천의무봉한 자이다.
이 10명 이하의 서열에 있는 자는 대부분이 김일성의 비서출신이다. 그러니 자기들 독자의 정견이 없는 자들이다. 이러한 자들의 서열이 때로 약간 변동이 있다 하여 북괴의 권력에 변경이 생길리는 없는 것이며, 변경이 생겼다고 떠드는 것은 북괴의 권력구조와 간부의 실정을 모르는 소리라 아니할 수 없다. 북괴의 간부라는 것은 김일성의 장기조각에 불과한 것이다.
남북대결을 김일성이 수락한 것은 이것을 대한와해공작의 일전술로서 채택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북괴군의 정찰국장과 공사를 역임하여 첩보공작에 익숙한 박성철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첩보공작을 잘 모르는 김영주는 일선에 내놓지도 않았던 것이었다. 모든 것은 김일성이 결정하며 부하들을 실무자로서 단순한 심부름꾼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간부의 변동이나 서열의 변동은 권력의 변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별 뜻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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