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너훈아'로 20년 … 그는 마지막까지 김갑순을 꿈꿨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9면

가수 나훈아를 연상시키는 외모와 노래 솜씨 덕분에 모창가수 ‘너훈아’로 사는 길을 택했던 김갑순씨. 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김갑순’으로 활동하겠다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중앙포토]

“아무도. 찾지 않는. 바람 부는 언덕에.♪ 이름 모를 잡초야. ♬”

 지난 13일 서울 한남동 순천향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진 나훈아 모창가수 너훈아(본명 김갑순·57)씨 빈소. 후배 모창가수 니훈아·나운아·이훈아가 둘러앉아 가수 나훈아의 ‘잡초’를 나지막이 읊조렸다. 지난 12일 간암으로 별세한 김씨는 나훈아를 빼닮은 외모와 가창력으로 100여 명의 나훈아 모창가수 중에서 단연 손에 꼽혔다. ‘나운아’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는 김명창씨는 “나훈아가 (모창가수 숫자가) 제일 많지만 그중에 김씨가 제일 닮았고 노래도 잘 부른다 ”고 말했다. 이윽고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란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들이 김씨를 기리는 방식이다.

 김씨는 1세대 모창가수였다. 김씨는 1989년 ‘명사십리’란 트로트 곡을 자기 이름으로 발표했지만 실패했다. 90년대 초 코미디언 고(故) 김형곤이 ‘너훈아’라는 예명을 지어주면서 20여 년간 ‘김갑순’이 아닌 ‘너훈아’로 밤무대와 지역축제 행사에 섰다. 이렇게 유명가수를 따라 하는 사람들은 ‘이미테이션 가수’로 불리기도 한다. 원조가수의 10분의 1 가격으로 활동하니까 불러주는 데가 꽤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주 활동무대인 클럽 등 밤무대 업소가 불황으로 문을 닫으면서 모창가수 숫자도 많이 줄었다. 92년 이미테이션가수협회가 세워질 당시 50여 명이 넘던 회원이 지금은 20여 명뿐이다.

 예나 지금이나 모창가수로 주목받기는 쉽지 않다. 기껏해야 남 흉내를 내서 먹고산다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김씨도 죽음 이후에야 유명세를 치렀다. ‘너훈아’란 이름이 포털사이트 검색어 1위까지 올라섰다. ‘니훈아’라는 이름으로 부산 지역에서 활동하는 이진호씨는 김씨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했다. “ 남들 손가락질당하면서도 사람, 노래가 좋아서 여기까지 왔 는데…. ”

 프랑스 철학가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선 현실의 모사나 이미지가 실재를 지배하고 대체한다고 했지만 너훈아 같은 모창가수에게 원조가수의 명성은 닿을 수 없는 먼 곳에 있었다. 김씨 빈소에서 가장 많이 들리는 얘기도 “나훈아씨는 안 올런가” 였다. ‘모창’을 한다는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 항상 원조가수를 의식하지만 인연이 닿기가 쉽지 않다. 원조가수 입장에서는 모창가수가 많아도 불만이고 없어도 불만이라고 한다. 모창가수가 많아지면 ‘내 노래가 따라 하기 쉬운가’라는 생각이 들고, 없으면 ‘요즘 내 인기가 덜한가. 서운하다’는 느낌이 든다는 거다. 그만큼 원조가수와 모창가수 관계는 가깝고도 먼 사이다.

왼쪽부터 모창가수 ‘주용필’ 딱지를 떼는 데 7년이 걸렸다는 가수 성노씨, 진짜 가수를 꿈꾸는 ‘해운대 남진’ 전찬영씨, 10년 넘게 각각 방실이와 현숙의 모창가수로 활동해온 신해숙·권종숙씨. [중앙포토]

 원조가수에 대한 고마우면서 미안한 마음도 있다. 10년 넘게 가수 방실이의 모창가수로 활동해온 ‘방쉬리’(본명 신해숙·51)씨. 신씨는 “방실이 때문에 제가 벌어먹고 사는데 병문안 한 번 갈 수 없어 죄송하다”고 말했다. 가수 방실이는 2007년 뇌경색으로 쓰러진 이후 가수 활동을 쉬고 있다. 가수 현숙의 모창가수 활동을 하고 있는 ‘현숙이’(본명 권종숙·49)씨도 마찬가지다. 권씨는 “원조가수가 ‘효녀가수’라는 타이틀이 있기 때문에 행사에서 노래를 부를 때도 말을 할 때도 더 신경 쓴다”고 말한다.

 ‘원조와 짝퉁’ 혹은 ‘실재와 모사’의 관계였던 모창가수와 원조가수의 관계가 ‘가수’와 ‘팬’의 만남으로 바뀌면서 분위기가 좀 달라졌다. 최근 원조가수와 모창 도전자들이 경연하며 진짜 가수를 찾아내는 JTBC ‘히든싱어’가 시청자들의 공감을 샀다. 이 프로그램의 노윤 작가는 “프로그램이 시즌2까지 가능했던 이유는 결국 모창이라는 게 ‘애정’이 없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원조가수와 시청자 모두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모창가수라는 굴레를 벗고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 음반을 낸 가수도 생겨났다. 20년 넘게 가수 조용필의 모창가수 ‘주용필’로 활동해온 성노씨. “제가 정말 죽기보다 싫었던 게 ‘짝퉁가수’로 불리는 거였다”고 말했다. 다행히 지난해 8월에 발표한 신곡 ‘오직 나만’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모창가수로 활동할 당시와 뭐가 달라졌을까. 그는 “내 팬이 생겼다”고 답했다. 실제 많은 모창가수들이 제 목소리로 음반 내기를 꿈꾼다. 너훈아로 활동했던 김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너훈아’는 ‘김갑순’으로 살고 싶었다. 하지만 생활고 때문에 최소한의 벌이가 보장되는 모창가수 활동을 접기는 쉽지 않았다. ‘주용필’도 7년이 걸렸다. 성씨는 “조용필을 20년 따라 하다 보니깐 나 자신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고 고백했다. 이어 “아마 너훈아 형님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길을 그만큼 더 연구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누군가에게 모창가수는 여전히 가수가 되는 ‘디딤돌’이기도 하다. 부산시 해운대구에서 일식집을 운영하는 전찬영(55)씨는 요즘 ‘해운대 남진’으로 바쁜 삶을 살고 있다. 히든싱어 ‘남진’편에 출연했던 그는 “제 식당까지 찾아와서 제 노래를 듣고 싶다는 팬들이 생겼다”며 “함께 노래방에 가면 방송에 나왔던 미션 곡을 다 불러 드린다”고 말했다.

 고(故) 김갑순씨가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부른 노래가 ‘눈이 내리네(Tombe La Neige)’라는 샹송이었다. 그 자리에서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나는 완쾌될 거다. 열심히 해서 신곡도 내고 잘해볼 거다”라고 했다 한다. 하지만 그 소원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그가 묻힌 곳 옆에 ‘명사십리’ 노래비가 세워졌다. 김갑순이 너훈아로 살아가기 전 불렀던 바로 그 노래다. 너훈아는 죽고 나서야 김갑순으로 돌아갔다.

위문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