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향학열|도의문화「심포지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폭발적 학생증가>지금으로부터 63년전인 1911년만해도 인구1만명당 70명밖에는 학교에 다니지 못했던 것이, 그리고 1945년인 해방 당시만 하더라도 1만명당 8백명, 즉 8% 밖에 안되던 것이 현재는 인구 1만명당 무려 2천5백명, 즉 25%가 학교에 다니고 있음을 보고는 특히 해방후의 학생수 급증을 놀라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다.
세계 제2차 대전의 종말과 함께 새 나라를 세우게 된 그런 점에서 우리와 사정이 같은 동남아시아의 나라들과 중등학생수의 증가경향을 비교해 보면 더욱 놀라게 된다. 「필리핀」이 1.4배, 인도가 그 보다는 많아서 3.6배, 태국과 자유중국이 좀더 많아서 3.9배이련만 우리는 무려 10.1배나 증가를 보였으니 그야말로 폭발이라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우리보다는 수십년이나 먼저 국민교육 제도를 가졌다는 점에서 우리와는 처지가 다른 나라이기는 하지만 일본의 경우는 1.7배이고 그보다도 앞서 그 제도를 가졌던 영국이 1.5배임을 아울러 생각하면, 그리고 대학생수의 증가에 이르러서는 중등학생의 경우보다 더욱 증가했음을 생각하면 누구나가 한국에 있어서의 폭발적 학생증가를 실감 할 수가 있을 것이다.

<향학열의 양면>
향학열이라고 하는 것은「배움에 대한 열의」로 생각할 수도 있고「학교 다니기에 대한 열의」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학교란 학생으로 하여금 배울 수 있게끔 여건을 마련해 주는 곳이기에 배움에 대한 열의나 학교 다니기에 대한 열의나 한가지가 아니냐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대다수 학생의 경우는「배움」과「학교 다니기」에 더한 열의가 매양 같을 것이지만 일부 학생들에 있어서는 배움에 대한 열의는 보잘 것이 없으면서도 교복을 입고「배지」를 달고 학교를 다니는 일에만은 대단한 열의를 보여줌으로써 배움에 대한 열의와 학교 다니기에 대한 열의가 일치하지 않을 경우도 있는 것이다.
사실은 소수 학생들만이 배움에 대한 열의를 가지고 있고 대다수는 그저 학교에 다니는 일에만 열의를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총 인구중 학생이 차지하고 있는 비율이 큰것에 비추어 남부끄러울이만큼 교과서 이외의 책은 사보지 아니하는 것은 물론 신문·잡지조차 외면하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향학열에는 두가지 측면, 즉「배움에 대한 열의」라는 면이 있고 다른 한면 즉「학교 다니기에 대한 열의」라는 면도 있는 것인데 전자는 이를 북돋워주고 넓혀 주어야 할 것이고 후자는 이를 바로 잡아「배움을 위한 학교 다니기」가 되게 해야 할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한마디로 빗나간 진학열은 이를 식히고 순수한 향학열은 이를 더욱 밀어주어야 할 것이다.

<빗나간 향학열>
이조시대에는 아들로 태어나면 서당이나 서원 다니기에 몰두한 끝에 과거에 급제하고 금의환향, 마침내는 높은 벼슬을 얻어 부모에는 효자요, 나라에는 충신이 필수 있었던 것이지만 일제 반세기 동안은 양반의 아들까지도 학교 다니기를 억압당해왔다.
왜정으로부터의 해방과 더블어 주권은 재민이고 교육의 기회는 균등이라는 민주주의가 밀어닥쳐왔다. 양반의 아들은 고사하고 서민의 딸까지 천추에 맺힌 한이라도 풀려는 듯 첫째도 학교고 둘째, 세째도 학교, 부모도 자녀도 오직 그에 대한 집념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었다.
부모는 먹을 것·입을 것을 줄이고도 자녀의 학비를 마련하면 그것이 자랑이었고 자녀는 진학을 위해서는 부모의 논·밭과 소·돼지를 팔아 달라고 조르는 경우조차 생기게 된 것이다. 한편 정부에서는 이토록 솟구치는 진학열을 형식적으로나마 충족시키려고 교육의 질은 이를 도외시 한채 오직 학생의 수용에만 급급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름만의 학교지 그 경영의 속을 들여다보거나 학생들이 받고 있는 교육의 질로 보아서는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할 지경의 학교가 늘어나게 되었다.
그렇게되자 이 졸업생들을 받아들이는 사회에서는 이 모든 학교들이 법률상 동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엄격한 차등을 둠에 이르렀고 이래서 일류교 진학의 열풍은 세차게 일게된 것이다. 한마디로 동서고금에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만큼의 병적인 입시준비였다.
마침내 중학교에의 무시험 추첨진학 결정이 내려지고 이어서 고등학교에까지 확대적용을 보게된 것이다. 그런데 중등교육에 대한 무시험 추첨진학은 일시적·표면상으로나마 과열된 입시에서 오는 패단을 없앤 듯 보이기는 하지만「순수한 의미의 배움을 보장하는 중등학교에의 진학」의 실현에까지 이르자면 전도가 요원한 형편에 놓여있는 것이다. 대학입학 예비고사 제도도 이로써 학력에 있어 고등학교 수준 미달자를 가려낸 셈이기는 하지만 올해만도 5만5천2백여명이 예비고사에 합격은 했으면서도 입학할 자리가 없어 낙방을 해야만 할 처지에 있는 것이고 대학에의 진학은 희망하며 예비고사에도 합격을 하지 못한 학생들까지 포함하면 무려 14만명의 고등학교 졸업생이 대학진학의 욕구를 좌절당한 처지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대학진학의 기회를 얻게 될 5만6천3백명은 그야말로 불만없이 학업에 몰두하게 될 것이냐 하면 도리어 그 대부분은 진학은 하면서도 이 대학 학생임을 창피하게까지 여기는 그런 대학에 수용될 판국에 놓여져 있다.
나라의 재정으로 보나 사회의 수요로 보나 실로 분에 넘치는 대학의 수요 규모이련만 대학생을 맞아 대학생답게 교육하고 있는 대학은 도리어 찾아보기가 어려운 형편에 놓여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마디로 대학에 이르러「학교를 향하는 열의」는 최고이면서「배움을 향하는 열의」는 도리어 최하라는 기현상이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단적으로 대학의 입학생수와 졸업생수를 비교해 보라. 거의 완전에 가까울이만큼 같은 것이다. 입학이 졸업의 보장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배움을 향한 열의는 없어도 학교를 향한 열의만 있으면 졸업하게 되어있는 것이 중학교나 고등학교가 아닌 한국의 대학인 것이다. 빗나간 향학열은 대학에 이르러 실로 그 절정에 달한다.

<가정이 해야 할 일>
울음 소리와 함께 이 세상에 태어난 아기가 1백일이 자나고 한돌이 되면 어느 가정에서나 그 아기가 어른이 되어졌을 때를 생각하며 소원을 하게된다. 그런데 그 경우 많은 가정에서는 권력과 금력을 다 함께 누릴 사람, 더 단적으로 말하면 입신출세의 기대를 걸게된다. 또 그 입신출세는「배워야」,「공부를 잘 해야」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그야말로 어린 시절부터 지나치게 강조해줌으로써 마치「배움」이 입신출세만을 위해서 해하는 것과도 같은 생각을 머릿속 깊이 넣어주는데서 향학열은 빗나가기 시작한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빗나감은 온 가정을 휘덮게 되는 일류학교에의 집념으로 바뀜에 이르러서는 매우 심각한 양상을 띠게된다.
여기서부터 어린이는 순수한 듯의 배움에서 이탈하게 되고 일류 교복의 착용이 곧 입신출세의 길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심한 경우에는 일류교복의 착용 그것만으로 이미 입신출세했노라 착각하는 경우조차 있다.
물론 2류 또는 3류 학교가 자취를 감추게되면 그보다 더 좋은일이 없겠지만 가정은 가정대로 어린이에게 지나치게 입신출세를 강조하는 일이라든가, 더군다나 1류 학교에의 진학이 그 입신출세만을 위하는 길인 것처럼 믿도록 이끄는 일은 그 자녀정신의 장래 행복을 위해서도 이를 최대한으로 자제해야 할 것으로 생각되는 일이다.
한편 배움은 훌륭한 인격을 갖추기 위한 스스로의 삶도 값있게 하고 남도 도와줄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한 것이어서 소위 입신출세와는 관련이 없을지라도 일생을 두고 계속해 갈 성질의 일이라는 것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빗나간 향약열을 바로 잡기위한 기본적 과업의 하나는 가정에서 어린이로 하여금 배움에 관한 옳은 생각을 가지게 가르치는 일이라 할 것이다.

<학교의 역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사회에도 어떤 종류의 것이든 경쟁이 있게 마련이고 따라서 그 속에 있는 학교 또한 학생간에 경쟁이 있어 도리어 자연스럽다고까지 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우리학교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좀 지나쳐서 학생들은 경쟁에 이기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으로 여기게끔 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필답고사의 점수로만 승패를 가려내는 점에 있어서도 그 정도가 지나친 바람에 학생들은 점수를 따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으로 여기게끔 되어지고만 것이다. 그래서 많은 점수를 따고 경쟁에 이긴 학생들에 있어서는 인격의 배양이라든가, 참다운 능력의 체득을 도외시하는 경향조차 생기게 되었고 적은 점수때문에 경쟁에 진 학생들에 있어서는 필답고사 점수따기 이외의 무궁무진한 배움의 세계전체를 외면하는 경향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지나친 경쟁속에 학생들을 몰아넣고 점수따기에 너무나 눈독을 들이게 한 학교교육은 그 속에서 승자가 되었건, 패자가 되었건 간에 올바른 향학열을 지니게 하지는 못하였다. 경쟁을 완화하여 협력을 북돋우고 시험점수의 비중을 낮추어 인격의 함양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학교풍토를 개선하는 일이야말로 빗나간 향학열을, 개인적으로는 행복을 가져다주고 사회적으로는 유익한 사람이 되게 하는 향학열로 환원시키는데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학교의 과업인 것이다. 한마디로 학원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야만 학생들의 빗나갔던 향학열도 본래의 순수한 향학열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사회의 임무>
가정에서의 부모와 자녀에게, 학교에서의 선생이 학생에게, 장차 잘 살게 되기를 바라고 그리 되게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함은 너무도 자연스러은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사회에서는 사람을 채용하거나 결혼상대자를 고르는데 있어 그 사람의 능력이나 행실을 보기에 앞서 대학을 나왔는지의 여부부터 본다면 어느 가정의 부모나, 어느 학교의 선생도 그 자녀, 그 학생에게 어떻게 해서라도 대학을 나오게 하고야 말 것이다.
지금의 우리사회는 지난날에 비한다면 형식적인 학력보다는 실질적인 사람됨이나 능력을 보는 방향으로 변해가고는 있다. 그러나 그 속도는 참기가 어려울만큼 느려서 가정과 학교의 힘만으로 빗나가고 있는 향학열을 바로 잡기에는 요원안 형편에 놓여 있는 것이다. 생각하면 학력과 경력을 보면 그 사람됨이나 능력을 짐작하기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이고 그래서 어느 나라, 어느 사회에서도 그것을 무시하지 않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큰 비중을 출신학교에 두고 있다. 사람됨이나 능력은 아랑곳 없이 등록금이나 내고 대학을 나왔더니 사실로 취직도 되고 처도 생기게 되는 것을, 그래도 무리한 대학진학을 포기하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됨이나 능력을 알아보기처럼 어렵고 시간이 걸리는 일도 없거니와 출신학교를 알아보기처럼 쉬운 일도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쉬운 길이라하여 지나칠이만큼 출신학교에 사로잡혀 사람을 채용하거나 결혼상대자를 구함으로써 빚어진 지난날의 개인적인 또는 사회적인 불행과 손실을 생각하면 이 일만은 단연코 우리사회에서 몰아내야 할 것이다. 그리되는 날 빗나간 향학열은 크게 바로 잡혀질 수가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향학열에는 빗나가고있는 일면이었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하여 해야 할 일을 가정·학교·사회로 나누어 생각해보았다. 이 3자는「향학열 바로잡기」라는 공동목표를 위해서 함께 손을 잡을 경우에만 각자의 일에 성과를 거둘 수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데 다시 이 3자의 협상은 정부가 그 정책, 그 여건을 마련해 주어야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 여건이란 무엇이겠는가. 이것은 한마디로 인격과 능력에 따라 일을 나누어하는 시회적 풍토인 것이다.
이러한 풍토가 정부에 의해서 조성되어야만 권력과 금력을 위주로 한 입신출세를 위한 1류교 진학만을 자녀들에게 강요한 가정도, 그리고 인격과 능력을 도외시한채 필답고시 점수위주의 상호경쟁만을 학생들에게 요구할 학교도 그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배움」을 향한 열의는 그것이 인격을 바탕으로 한 능력의 배양에 쏠리고 있는 한은 더 있을수록 좋은 것이지만 지난날과 오늘처럼 그것이 빗나갈 경우에는 바로 이 향학열때문에 개인도 사회도 함께 피해를 보게될 수도 있는 것이다.
김종서 <한국방송통신대학장>
정태정 <한국교육개발원연구원>
여석기 <고대교수·교양학부장>
성내봉 <연세대교수·교양학부장>
주제 향학열
일시 1974년 1월 l2일 하오3시
장소 중앙일보 회의실
(좌)로부터 여석기·정태범·성내봉·김종서씨.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