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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양이, 양신을 키워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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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이세돌과 궁합 맞는 신민준(사진 가운데 왼쪽) 처음엔 두텁고 느릿해서 전형적인 이창호 스타일로 분류됐다. 이세돌의 제자가 되면서 공격적으로 변함. 이창호와 궁합 맞는 신진서(사진 가운데 오른쪽) 상상력이 풍부하고 실리적. 예측불허 행마까지 이세돌을 빼닮음. 이창호를 스승으로 얻으면 금상첨화.

이창호 9단과 이세돌 9단을 중국에선 ‘양이(李)’라 불렀다. 세월이 흘러 중국 바둑이 양이의 철벽을 뚫었고 2013년 드디어 세계 바둑의 왕좌는 한국에서 중국으로 넘어갔다. 중국의 비밀병기는 잘 훈련된 나이 어린 신예들이다. 지난해 세계대회에서 우승한 판팅위(17), 스웨(23), 저우루이양(23), 천야오예(25), 미위팅(17), 탕웨이싱(21) 외에도 세얼하오(16), 양딩신(16) 등 이미 세계무대에 이름을 알린 소년강자들이 널려 있다. 한국은 어린 축에서 중국에 맞설 만한 인물이 박정환(21) 한 사람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국은 2년 전 ‘영재입단’이란 제도를 처음 만들어 신진서(14)-신민준(15) 두 명의 소년을 입단시켰다. 매우 늦은 조치였지만 그래도 이 제도가 꺼져가는 한국 바둑에 희망의 씨를 뿌렸다. 신진서-신민준은 ‘양신(申)’이라 불리며 각종 대회에서 빠른 성장을 보였고 바둑계도 무한한 기대를 품게 됐다. 일찌감치 천재로 주목받은 신진서는 수읽기가 창의적이고 날카롭기 그지없다. 실리적이며 타개에 능하고 예상을 벗어나는 기발한 착상이 이세돌 9단의 기풍을 꼭 닮았다. 신민준은 두텁고 느릿해서 전형적으로 이창호 9단을 연상시키는 바둑을 두었다. 처음엔 신진서에 가려 덜 주목을 받았지만 프로 성적은 오히려 신진서를 앞섰다. 신민준은 이세돌 9단의 제자가 되면서 기풍이 공격적으로 변했다. 담금질이 시작된 것이다.

 지난 13∼14일 신진서(랭킹 48위)와 신민준(랭킹 40위)은 한국의 최고 유망 신예 8명이 출전한 제2기 합천군 초청 미래포석열전에서 나란히 결승에 올랐다. 신진서가 2대0으로 승리해 우승을 차지했지만 반 집 차이로 승부가 갈리는 등 바둑 내용은 막상막하였다. 이들 죽죽 커가는 ‘양신’에게 날개를 달아 줄 방법은 없을까. 신민준은 이미 이세돌이란 스승이 있다. 그렇다면 신진서가 이창호란 스승을 만난다면 ‘양이(李)’가 ‘양신(申)’을 키우는 형국이 된다.

 이창호-신진서, 이세돌-신민준의 만남은 바둑의 기술적 측면에서도 참으로 이상적이다. 비슷한 기풍보다는 정반대의 기풍 속에서 더욱 치열한 창조가 꽃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창호 9단은 지극히 겸손한 성품이라 “최근 성적도 별로인데 가르쳐줄 게 있겠느냐”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초를 다투는 실전의 얘기일 뿐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창호의 감각과 판단력, 대세관 등은 조금도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온존해 있다. 그 최고의 노하우를 누군가 이어받지 않고 그냥 사라지게 한다는 것은 한국 바둑의 엄청난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중국에 강력한 신예들이 우후죽순처럼 출현했지만 이창호-이세돌 같은 절대 강자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한국 바둑은 조훈현 시대 이래 천재 한두 명의 힘으로 세계를 지배해 왔다. 세계 바둑이 과거와 같은 일인 독주가 불가능해진 건 사실이지만 작은 한국이 큰 중국과 겨루려면 천재를 발굴하고 키우는 수밖에 없다. 이세돌-신민준의 만남에 이어 이창호-신진서의 만남은 실로 매혹적이다. 이창호 9단에게 진심으로 신진서의 스승이 되어 달라고 청하고 싶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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