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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노스리지 지진 20주년…되돌아 본 악몽의 순간들

미주중앙

입력

1994년 1월17일 강진으로 무너진 노스리지의 미도우스(Meadows) 아파트. 당시 거주하던 40가구중 한인 이필순(46)씨와 아들 하워드 이(15)군 부자가 건물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숨졌다. [AP]

단 20초였다. 1994년 1월17일 새벽 4시31분, 동트기 전 고요는 그 짧은 순간 아비규환으로 바뀌었다.

LA북서쪽 20마일 지점 노스리지에서 시작된 규모 6.7 강진의 시작이었다.

진동과 동시에 벽과 천장이 무너졌고 땅이 솟아올랐다. 깨지는 소리, 무너지는 소리가 한꺼번에 뒤섞여 폭탄소리처럼 남가주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지기 시작했다. 반경 85마일내 건물 4만여채가 무너져 60여명이 숨졌고, 5000여명이 다쳤다.

주요 변압기들이 터지면서 LA시내 90%에 전력 공급이 중단됐다. 10번, 14번, 210번 프리웨이 등 주요고속도로도 끊어졌다. 장거리 전화는 불통이었고 국제공항도 셧다운됐다. 칠흙같은 암흑 속에서 LA는 완전히 고립됐다.

마침 당일은 마틴루터킹 주니어 데이였다. 휴일의 단잠은 순식간에 악몽이 됐다. 주민들은 한꺼번에 거리로 내몰렸다. 밖에서도 사람들은 여진 때문에 공포에 떨어야 했다. 사방에서 소방차와 앰뷸런스, 경찰차량의 사이렌이 울렸고, 사이렌이 없는 곳에선 도난경보장치들이 한꺼번에 울어댔다.

다음날 LA타임스는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 재앙의 도시가 됐다"고 처참한 상황을 보도했다. 또 다른 언론도 "약속의 땅인 가주가 실락원으로 전락했다"고 개탄했다.

한인 피해도 컸다. 사망자중 4명이 한인이었다. 노스리지 한 아파트가 무너지면서 이필순(당시 46세)씨와 하워드 리(당시 15세)군 부자가 압사했다. 남편과 아들이 살아있길 간절히 기도했던 이현숙씨가 두사람이 숨진 채 발견되자 혼절하는 장면이 주류방송을 통해 생중계됐다.

LA한인타운의 올리브노인아파트 6층에 살던 나기봉(당시 91세) 할머니도 심장마비로 숨졌다. 신원이 공개되지 않은 미성년자 한인 소년도 밴나이스 아파트서 사망했다.

재산상의 피해는 더 처참했다. 진앙지는 한인 밀집 거주지역이었다. 한인 주택 200여채가 무너졌다.

특히 92년 LA폭동 이후 2년만에 다시 찾아온 재앙에 어렵게 땅위로 고개 내민 '재기의 싹'도 깔리고 말았다.

폭동 당시 폭도들에 의해 운영하던 주유소를 잃은 한상돈(당시 46세)씨는 지진 뒤 화재로 집까지 잃었다.

불행은 겹쳤지만 폭동 경험 덕분에 한인들은 더 빨리 똘똘 뭉칠 수 있었다. 지진 발생 4시간만에 LA한인회, 남가주한인노동상담소, 한인청소년회관, 한미연합회 등등 13개 한인대표단체가 힘을 모아 노스리지 인근 한인교회 밸리연합감리교회에 구제센터를 차렸다.

구제센터 개원 소식이 알려지자 한인들은 식수, 라면, 쌀, 김밥 등을 들고 찾아왔다. 센터에는 한인교회 봉사자 100여명이 모여들었다. 이들이 만든 따뜻한 국밥 한그릇에 한인을 포함한 이재민들은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

올해로 20주년을 맞은 노스리지 지진 당일의 기록이다. 불과 20초의 재앙이 남긴 여파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많은 법적 규제와 지진 대비책들이 마련됐지만, 아직도 미흡하다. 최근 USGS와 LA타임스 공동 조사에 따르면 1976년 이전에 지어진 LA시내 대형 콘크리트 빌딩 1000채 중에서 50여채가 지진에 여전히 취약하다.

이런 지적에 따라 LA시는 올해 지질연구소와 처음으로 손잡고 시내 빌딩과 송수신탑, 식수공급망을 보호하기 위한 조사에 나선다. 14일 공동조사 계획을 발표하며 에릭 가세티 LA시장은 "앞으로 빅원은 더 심각할 수 있다"고 배경을 밝혔다. LA시의회도 20주년을 맞아 최소 8개 지진관련 법안을 추진중이다.

지진 당일인 17일에는 LA를 비롯한 남가주 곳곳에서 20주년 관련 행사가 이어진다.

정구현 기자 koohyun@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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