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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들고 간송 선생 찾은 게 어제 같은데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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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다들 서화, 화려한 청자나 흠없는 도자기를 찾았지만 내 눈길을 끈 것은 심심한 듯한 조선백자, 그 중에서도 어딘가 결함있는 것들이었다”며 홍기대(92) 옹은 해주백자를 꺼내들었다. “1946년 손에 넣은 뒤 처음 내보이는 것”이라며 200년 묵은 항아리를 쓰다듬던 그는 “무덤덤한 듯 단조로운 백자의 모습은 내 인생과도 닮았다면 닮았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그에겐 고미술이 밥이었고 삶이었다. 우당(又堂) 홍기대(92) 전 구하산방 대표 얘기다. 열 네 살에 들어간 문방구점 겸 골동상 구하산방이 그의 운명이 됐다. 간송미술관과 삼성미술관 리움의 컬렉션, 더러는 중앙박물관이나 이화여대 박물관에 들어간 문화재급 컬렉션이 그의 손을 거쳐 형성됐다.

 화상이지만 그에겐 원칙이 있었다. ‘돈보다 자료적 가치를 따져라’ ‘박물관 하고자 하는 이에게 몰아 줘라’ ‘ 불법의 냄새가 나는 곳에는 가지 말라’는 신조를 지키며 ‘인사동의 전설’이 됐다. “손님들에게 누를 끼칠까봐” 오랫동안 입을 무겁게 닫고지냈다는 그가 자신만의 ‘고미술 역사’를 털어놓았다.

10일 전시에 나오는 15세기 백자. 병에 끈을 묶은 듯한 철화문, 양옆에 적은 이백의 시가 특징이다.

 회고록 『우당 홍기대-조선백자와 80년』(컬처북스) 출간을 앞두고서다. 7일 홍은동 자택을 방문했다. “평생 고물상 한 사람일 뿐”이라며 손사래치던 그가 펼쳐놓는 옛 물건, 옛 사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독립운동 하던 아버지가 만주로 망명하면서 졸지에 가장이 됐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취직한 곳이 마침 골동상. 당시 월급이 8원으로 쌀 한 가마니값, 음식점 종업원(5원)보다 많았다.

“만약 내가 구하산방의 점원이 아닌 설렁탕집 배달원으로 일을 시작했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 순간에는 그 일이 나의 인생을 이렇게 풍요롭게 만들 줄 꿈에도 몰랐다”고 돌아봤다. 거기서 먹고 자며 일을 배웠고, 주인이 포장한 물건을 건네면 배달도 다녔다. 이당(以堂) 김은호(1892~1979), 수화(樹話) 김환기(1913~74), 고암(顧菴) 이응노(1904∼89) 등 당대의 문인 묵객이 가게를 드나들었고, 간송(澗松) 전형필(1906∼62) 집에도 자주 심부름갔다고 한다.

 -간송은 어떤 사람이었나.

 “말없이 점잖고 꼼꼼한 분이었다. 양자로 들어가 골동을 사들여 ‘양자 때문에 집 망하겠다’는 등 별별 소리도 다 들렸다. 내가 열 네 살 때 그는 스물 아홉 살, 그 젊은 양반이 우리 고미술을 지키겠다는 생각을 가졌으니 대단하다. 그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해방 후 일본인들이 두고 간 물건들이 충무로 옛 스카라 극장 앞에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은 6·25 전쟁통엔 가장 귀한 것만을 들고 부산에 피난 가 거기서도 골동장터와 경매를 열었다. 어려웠지만 찬란했던 시절이었다. 간송과 더불어 일제시대 4대 컬렉터로 꼽혔던 서예가 소전(素田) 손재형(1903~81)과 교류를 시작한 것도 그무렵이었다.

 -리움 컬렉션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수많은 화상이 드나드는 집이었다. 나까지 껴서 뭐하겠나 싶었지만 중간에서 방문을 청하는 이가 있어 지나가는 말로 ‘초청장이나 보내면 모를까’ 했더니 정말 초청장이 왔다. 고미술에 깊은 관심을 가진 30대 부부가 맞았다. 다음날부터 우리집에 찾아와 내가 가진 도자기들을 보다가 점심 시간이 되자 그댁으로 옮겨가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길 열흘을 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지금의 이건희 삼성 회장 내외다.”

 그는 70년대 도쿄·뉴욕 등지로 다니며 우리 미술품을 사모으기도 했다. 이 회장의 청이었다. 소전의 오랜 투병으로 그의 애장품이 흩어지고 해외에 반출될 위기에 처했을 때 리움이 소장토록 주선한 것도 그였다. ‘청화백자 철채난초청낭자문병’(靑華白磁 鐵彩蘭草靑娘子文甁), ‘청자 상감국모란문 신축명 벼루’(靑磁象嵌菊牡丹文辛丑銘硯) 등이 대표적이다.

 -우리 고미술품 중 가장 비싸게 거래된 것이 1996년 뉴욕 경매에 나온 철화백자운룡문호(鐵繪白磁雲龍文壺, 당시 환율로 70억원대)다. 십 수 년이 지나도 이 기록이 깨지지 않는다. 반면 청대 ‘길경유여(吉慶有余)’ 무늬 도자기는 973억원대에 팔렸다. 왜 우리 미술품 가격이 중국에 비해 낮을까.

 “국력이다. 미술품의 가치는 국력에 비례한다. 최고로 치는 명대 청화백자들과 같은 시대의 것이 조선 청화다. 허나 가격으로 치면 우리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워낙 우리 자기가 희소한데다가 이미 박물관에 많이 들어가 시장에서 내세워 거래할 만한 것이 점점 드물어진다.”

 어느덧 그와 한 시절을 함께 했던 컬렉터·문인·묵객·화상 대부분이 세상을 등졌다. 그만이 남아 당시를 회고한다. 저들이 모으고 아꼈던 것들은 더러는 흩어지고 더러는 박물관에 남았다.

 -80년 가까이 고미술과의 인연을 이어 오면서 가장 안타까운 점은.

 “많은 유물을 봤다. 그러나 전쟁으로 흩어진 것들도, 감당할 주인을 만나지 못하고 해외로 흘러나간 것들도 있었다. 생각할수록 안타까운 일이다.”

 10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1층에서 그의 출판기념회가 열린다. 200여점 규모의 전시(19일까지)도 함께 열린다.

글=권근영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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