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9)<제31화>내가 아는 박헌영(178)|박갑동(제자 박갑동)

중앙일보

입력 1973.09.28 00:00

지면보기

종합 05면

<연재를 끝마치며>
먼저 독자 여러분의 끝까지 변함없으신 애독과 많은 애로에도 불구하고 연재를 계속하여주신 중앙일보사의 여러분께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이 글을 쓰게된 동기는 누구를 원망하기 위하여 쓴 것도 아니고 박헌영을 두둔하기 위하여 쓴 것도 아닙니다. 대단히 쓰기 어려운 이 글을 감히 쓰게된 것은 제가 죽기 전에 알려지지 않은 어둠 속에 파묻혀 있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하여 남기는 것이 행여나 어느 면에 있어서 「플러스」가 될까해서 입니다.
조국의 주권을 빼앗긴 식민지 노예 상태에 놓여있던 이 땅에 제가 출생하였을 때부터 비극의 십자가를 짊어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가정환경으로 말미암아 너무나, 일찌기 마치 선천적인 생리와 같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불행의 첫 시작이라고 생각됩니다. 열 한 살 때 조국의 독립을 빼앗기게 된 박헌영도 남달리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불행의 첫 시작이겠지요. 그러나 불행의. 참된 원인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불행의 참된 원인은 우리나라가 미·소 양국에 의하여 분할 점령당함을 계기로 하여 그 틈에 끼여든 외세의 앞잡이, 김성주(자칭 김일성)가 억지로 북한의 정권을 장악한데 있었습니다.
이 글을 쓰는데 있어서 상당한 부분을 저의 체험에 의하여 썼습니다만 정확을 기하기 위해 많은 문헌자료와 관계 당사자에 대한 취재에 의하여 썼습니다. 그러나 박헌영과 남로당에 관한 문헌자료가 대부분 다 없어져 버리고 남아 있는 것이 너무나 적은데 새삼스레 놀랐으며 동시에 곤란을 당하였습니다. 자료가 적으면 적을수록 지금 제가 써놓지 않으면 이 뒤에 쓸 사람들이 큰 곤란을 느낄 것을 생각하여 불완전하나마 이 기회에 쓰기로 한 것입니다. 다행히도 제 개인으로서는 도저히 구하지 못할 자료들을 중앙일보사에서 구하여 주어서 이 정도의 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 특히 구하기 어려운 많은 사진들을 구하였는데 이것은 중앙일보사와 같이 유력하며 대규모의 언론기관이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한국 내에 없는 자료는 구하기 어려운 외국의 「마이크로 필름」자료까지 구하여 참조를 하였습니다.
이 글을 쓰는 도중 애독자 여러분의 특별하신 관심의 열기를 필자 스스로가 직접 감득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큰 고무가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애로를 극복하고 끝까지 다 쓸 용기를 가진 것은 오로지 애독자 여러분의 덕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글에는 박헌영의 정견과 그의 주장은 될 수 있는 대로 생략하였습니다. 김일성의 그것과의 대비 위에서 썼더라면 더, 명확한 박헌영의 「프로필」을 그릴 수 있었을는지도 몰랐습니다.
영영 캄캄한 어둠 속에 파묻혀 있던 박헌영에게 이 정도의 「라이트」를 비치게 된 것도 한국의. 민주주의가 그만큼 발전된 덕택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상의 전향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는 경찰에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거나 또는 오랜 감옥살이를 강요당하여, 즉 외부의 강제적 압력에 의하여 사고방법과 행동의 방향을 그치는 것을 말하여 왔었습니다. 그것은 정상적인 논리적 귀결이 아니고 비 자율적인 의미에서 평가를 받지 못하여 왔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러한 외부의 압력에 의한 강요 없이 남북한에서의 정치생활뿐만 아니라 다른 공산주의 사회에서와 자유주의 국가에서의 자유스러운 긴 생활 체험에 의하여 사고방법과 행동의 방향이 전과는 확실히 많이 달라졌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전향이라기보다 발전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소련 「치타」행 비행기를 타고 평양 비행장을 떠난 지 11년만에, 동란 때 서울을 떠난 지 18년만에, 고향을 떠난 지 21년만에 외국들을 떠돌아다니다가 수년 전에 고향에 무사히 살아 돌아올 수가 있었습니다. 고향에는 90이 넘은 노모와 남편을 조국독립에 바쳐 일생을 거의 과부로 지낸 70이 가까운 형수의 두 늙은 분이 집을 지키며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수백 명의 인근 동네사람들이 찾아와서 환영을 하여 줄 때 여기에 동포애가 있고 이곳이 바로 나의 조국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민주기지며 자유기지며 아름다운 인간생활이 있는 한국을 수호하여야 하겠다는 마음이 저의 가슴속에 벅차 올랐습니다.
김일성은 지금 남북이 연방제로 하여 통일하자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주장도 아니고 벌써 오래 전부터 최용건 등을 시켜 이런 주장을 한일이 있었습니다. 김일성은 참으로 남북이 평화공존을 지속하여가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하게 평화통일 의 길을 걷게 하기 위하여 그렇게 주장한 것일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연방제로 하여 단일국가로서의 형태를 갖추게 된 후에는 김일성이 무력으로 한국을 침략해도 그것은 법적으로는 어디까지나 국내의 「쿠데타」이며 내정 문제로 되어 한국의 우방이 개입하려면 내정간섭이 되기 때문에 개입을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김일성은 그것을 노린 것입니다. 얼핏 듣기에는 연방제도 무방하여 보이나 그것은 김일성의 저의와 전술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남북연방제는 김일성 정권이 없어지고 난 뒤의 문제일 것입니다.
우리의 민주기지이며 자유기지인 한국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북한에 가서 실컷 죽을 고생을 해보고 늦게야 깨달았습니다 만은 그 만큼 더 깊이 느낀 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를 빕니다.
1973년9월28일<차항 끝>

<다음은 박병래 씨의 글「골동품 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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