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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사례로 본 철도 민영화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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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노사 갈등의 핵심 쟁점이었던 수서발 KTX 법인의 성격을 둘러싼 논란이 쉬 가라앉지 않고 있다 .
 정부는 만성적인 코레일의 적자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경쟁체제를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노동계는 ‘경쟁체제=민영화’라는 의구심을 버리지 않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민영화냐 아니냐 하는 ‘용어’가 아니라 막대한 철도 부채다. 영국·일본·독일도 부채 문제 해결과 성장 동력 마련을 위해 철도 민영화에 나섰다. 단어는 같지만 구체적인 내용과 성과에 대한 평가는 모두 다르다. 민영화가 정답인 것도, 그렇다고 무조건 오답도 아니라는 얘기다. 민영화는 ‘각 나라의 역사적 구조와 제도적 전통 아래 각 이해당사자들의 생각이 서로 충돌하고 갈등하며 만들어진 결과물’(구춘권 영남대 교수)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해외 사례를 통해 철도 문제 해결 방안을 짚어봤다.

#1. 3일 오전 서울 강남구 지하철 수서역 인근. 한겨울임에도 공사장을 오가는 트럭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2016년 1월 개통할 KTX 수서~평택 노선의 출발역이다. 이번 철도파업의 도화선이 된 수서발 KTX 법인의 현장이기도 하다. 철도시설공단 수도권본부 관계자는 “지난해 말 기준 45%의 공정률을 달성했다. 2015년 상반기 중에 건물과 철로 같은 기반시설 공사를 모두 마치기 위해 휴일 없이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2. 같은 날 오전 9시30분 서울역. 곧 출발할 진주행 무궁화호 1271열차에 승객들이 오르고 있었다. 23년 경력의 승무원 A씨는 수시로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하며 승객들의 탑승을 돕고 있었다. 이름을 밝히지 말라는 A씨는 “직원들과 파업에 대한 얘기는 서로 안 한다. 귀족 노조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억울한 측면이 있다. 오해를 떨치기 위해 모두 제자리에서 열심히 일하자는 분위기다”라고 전했다.

 열차 탑승을 기다리던 김영근(46)씨는 “파업을 보면서 참 답답했다. 빚이 엄청나다는데 그대로 두면 결국엔 다 국민의 혈세로 나중에 탕감해 줘야 하는 것 아니겠나. 부채를 줄이기 위한 경영혁신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코레일의 누적 부채는 2013년 상반기 기준으로 17조원이 넘는다. 국토교통부 신광호 철도운영과장은 “현재 추세대로 갈 경우 2020년 누적 부채는 20조원에 이르며, 여기에 철도시설공단 등의 건설 부채까지 합치면 50조원에 달하게 된다”고 말했다. 지난해 매출이 4조8153억원인 코레일이 갚아 나가기에는 역부족이다. 일부에서 철도가 민영화되면 요금이 4~5배 비싸진다고 주장하지만, 부채를 해결하지 않으면 지금 체제에서도 요금을 몇 배는 올려야 할 지경이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막대한 부채를 세금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

 부채의 해결책을 두고 정부·코레일과 노동계의 입장은 판이하다.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적자 노선에 운영비도 못 건지는 역사 한 곳에 3교대로 10~20명의 직원을 두는 곳이 수두룩하다. 이걸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자회사를 통해 경쟁체제가 도입되고, 이를 통해 경영이 투명해져야 코레일이 살 수 있다”고 본다.

 이를 통해 운영 비용을 10% 줄이고, 수익을 5%가량 더 올리면 영업적자가 흑자로 돌아서면서 회생의 가닥이 잡힐 거라는 입장이다. 노동계는 부채 자체가 정부 정책의 실패 때문인데, 이걸 다 코레일과 노조의 책임으로 돌려 구조조정을 하려는 것 아니냐고 의심한다. 현직 기관사인 박조영(철도운수경영학) 송원대 교수는 “인천공항 철도의 부채를 떠넘기고 높은 선로 사용료 등 구조적 문제를 방치한 게 정부 아닌가. 노조가 방만경영의 책임자라는 말은 틀렸다”고 말했다.
 
철도 민영화 택한 나라의 현실은
일본, 영국, 독일에서는 과도한 부채 때문에 철도 민영화가 촉발됐다. 민영화 직전인 1986년 일본국유철도(공사)의 누적 부채는 37조1000억 엔에 달했다. 영국도 1950년대 철도 전성기에 비해 여객·화물 운송 분담률이 3분의 1 이하로 줄면서 민영화 직전 매년 수억 파운드의 적자를 기록했다.

 독일 연방철도(분데스반)도 방만한 인력 운영과 부채에 허덕였고, 통일과 함께 더 열악한 동독 제국철도(라이히스반)를 떠안으면서 빚에 짓눌렸다.

 부채 문제 해결과 경쟁력 향상을 위해 시작된 민영화에 대한 평가는 관점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일단 민영화된 철도 기업의 경영 효율성만 보면 성공적이다. 우송대 이용상(철도경영학)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1993~94년(영국 회계연도는 4월부터 1년 간) 2억6500만 파운드의 적자를 기록한 영국 철도사업은 2004~2005년 2억7300만 파운드 흑자가 된다. 일본국유철도는 1986년 1조7001억 엔의 적자를 기록했지만, 2000년 민영 JR 여객 6개사는 6172억 엔의 흑자를 냈다. 독일의 도이체반은 민영화 이후 직원을 절반 이하로 줄이고도 세계적으로 강력한 다국적 철도 기업 중 하나가 됐다. 하지만 민영화 이후 효율성이 크게 성장한 배경에는 세 나라 모두 출범 당시까지 누적된 부채의 상당액을 탕감해 줬다는 사실이 있다. 이종원(행정학) 가톨릭대 교수는 “코레일 부채 중에는 과거 KTX 시설 투자에서 생긴 게 상당하다. 부채를 탕감하거나 줄였던 외국과 다르다”고 말했다.

 소비자 입장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건 요금과 서비스 수준이다. 철도노조를 비롯한 민영화 반대 진영에서는 민영화가 되면 큰 폭으로 요금이 오른다고 주장하지만 이건 사실과 거리가 있다.

 일본은 소비세 인상 같은 외부 요인 외에 20여 년 전과 비교해 요금이 거의 오르지 않았다. 일본 도쿄~신오사카 구간의 경우 민영화 직후와 현재의 요금 차이가 10%도 안 된다. 독일도 별 변화가 없다.

 영국은 민영화 이후 요금이 비싸졌다. 영국 철도규제청(Office of Rail Regulation) 자료에 따르면 2004년부터 2011년까지 7년간 영국 장거리 철도의 평균 요금은 40.7% 올랐다. 그러나 명목상이 아니라 인플레를 감안한 실질 인상률은 2013년을 1995년과 비교할 때 23% 정도라는 것이 영국 의회의 보고다.

 일부 주장처럼 영국 철도요금이 민영화 때문에 한국 요금의 5배나 된다는 얘기도 틀렸다. 영국 철도는 예약 없이 역에 가서 아무 때나 출발할 수 있는 표(Anytime)와 예약표(Advance), 여유 시간표(Off peak)의 가격이 크게 차이가 나는 걸 오해한 결과다. 서울~부산 구간과 거리가 비슷한 런던(킹스크로스역)발 뉴캐슬행 고속열차 일반석의 평일 요금표를 보자. 운영사 이스트코스트가 파는 비예약표의 공시 가격은 무려 150.5파운드(약 26만1100원)나 된다. 예약 없이 아무 때나 탈 수 있고 환불도 마음대로지만 물정 모르는 외국인 외에 이 표를 살 사람은 없다. 예약표는 훨씬 싸다. 이른 시간에 출발하는 열차는 대부분 30파운드 이내다. 피크 타임의 몇몇 열차는 80파운드고 가장 일반적인 요금은 60.75파운드(약 10만5000원)다. 가장 비싼 예약표는 131파운드지만 이건 이스트코스트와 다른 회사가 연결 운행해 할인이 안 되는 특수한 경우다. 같은 날 시간대만 다른데 요금 차이가 5배나 된다. 영국만큼은 아니지만 독일은 물론, 여객 운송이 국영인 프랑스의 TGV도 시간대에 따라 요금 차이가 30~40%쯤 난다. 항공 요금처럼 수요에 맞춰 수익을 높이려는 전략이다.

 또 명목상 요금이 비싸도 실제 그 나라의 국민소득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

 주요 선진국의 요금은 한국의 1.6~2배지만, 물가 수준을 감안한 구매력 기준으로 보면 훨씬 격차가 준다. 한국교통연구원 이재훈 철도정책기술본부장은 “민영화만 하면 요금이 몇 배씩 뛸 거라는 말 자체가 선동이다. 자동차·항공 같은 대안이 있고, 정부 규제가 있는데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나”라고 말했다.
 
정치·사회적 합의와 설득이 중요
민영화 이후 주요국에서 큰 문제가 된 건 요금보다 안전성이다. 물론 민영화가 무조건 안전 사고를 늘리는 건 아니다. JR의 경우 연평균 안전사고 발생 건수가 민영화 이후 절반으로 줄었다. 다만 경영상 어려움이 있는 취약 노선에 사고가 집중되는 경향은 뚜렷하다.

 2011년 5월 JR홋카이도의 특급열차가 터널 내 탈선·화재 사고를 일으켜 79명이 부상했다. JR홋카이도는 민영화 이후 만들어진 여객수송 6개사 가운데 대표적인 적자 회사다. 민영화 이후 경영 효율만 강조하다 보니 안전에 대한 투자가 미흡했던 결과라는 비판이 있다.

 영국도 2000년 하트필드 열차 전복사고로 여론이 나빠졌다. 민영화 이후 생긴 외주 유지·보수 회사가 제때 선로를 고치지 않은 게 사고 원인이었다. 이후 영국 정부는 민영화된 철도의 시설 분야를 공공기관으로 되돌리는 등 민영화 정책이 후퇴했다.

 취약 적자 노선의 존재와 이들의 장기적인 안전성 문제는 철도 개혁의 또 다른 과제다. 그런데 이건 코레일 경쟁체제 도입이나 민영화 같은 철도 내부의 문제를 넘어선다. 이용상 우송대 교수는 “현재 지방교부세 중 매년 2조원 정도가 지방 도로 교통에 쓰이는데 이걸 지방 정부 관리 하에 철도와 나눠 쓰도록 틀을 바꿀 필요가 있다. 훨씬 효율성이 높아지고 공공성도 유지할 수 있는데 이는 코레일이나 노조, 국토부를 넘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제도 도입 과정에서 정치적 합의와 설득이 중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구춘권(정치외교학) 영남대 교수는 “한 가지 방법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독일 철도의 민영화는 통일이나 유럽 통합 같은 외부 영향 탓이 컸지만, 내부에서도 정부가 노조원들의 고용 조건을 상당히 보장하는 등 장기간에 걸쳐 성의 있는 접근을 했다. 민영화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새로운 정책을 추진할 때 이해당사자의 입장을 충분히 듣고 포용하는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승녕·노진호 기자, 박성의 인턴기자 franci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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