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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속으로] 그룹 신년사로 본 '회장님 스타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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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2일 오전 11시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 다이너스티홀. 수도권에 근무하는 삼성그룹 임원 1800여 명이 모여 신년 하례식을 하는 자리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기자 100여 명이 진을 칠 정도로 언론의 관심도 높았다. 지난해 삼성전자가 사상 최대 실적을 올리면서 선전했지만 이건희(72) 삼성전자 회장의 새해 화두는 “다시 한 번 바꿔야 한다”였다. 이 회장은 “(지금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불확실한 상황”이라며 사업구조와 기술, 시스템 혁신을 주문했다. 하례식 무대 옆에는 ‘한계 돌파’라는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한 참석자는 “대체로 신년 축하와 격려 분위기였지만 한편으론 위기의식과 긴장감이 감돌았다”고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이 회장은 짧지만 여운 강한 메시지를 던지는 것으로 유명하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계열사 사장단을 모아놓고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1993년)며 신경영을 선포한 것이나 일본의 기술, 중국의 저가 공세에 밀리고 있는 한국 경제의 현주소를 꿰뚫은 ‘샌드위치론’(97년) 등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재계 신년사엔 기업 총수의 경영 스타일이 그대로 묻어난다. 이건희 회장과 구본무(69) LG그룹 회장, 허창수(66) GS그룹 회장 등은 신년사에서 주로 ‘일하는 자세’ ‘혁신 의지’ 등을 주문하고 있다. “시대 흐름에 맞지 않는 사고방식과 제도, 관행을 떨쳐 내자”(2014년 이건희 회장), “고객에게 선택받고 시장에 인정받는 ‘선도 상품’으로 반드시 성과를 내야 한다”(2014년 구본무 회장), “기존 방식만으로는 고객의 요구에 부응할 수 없고 남의 뒤만 쫓아서는 트렌드를 선도할 수 없다”(2014년 허창수 회장) 같은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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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너는 신년사, CEO는 창립기념사 공식

 정몽구(76) 현대차그룹 회장과 김창근(65)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 김준기(70) 동부그룹 회장 등은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제시하는 스타일이다. 정 회장의 신년사는 “신차종 4~5개를 개발하고 차종당 판매 대수를 50% 이상 늘려야 한다”(2003년), “올해 생산·판매 목표를 786만 대로 확정했다”(2014년)같이 ‘숫자’로 설명된다. 경영학 교과서에 나오는 핵심성과지표(Key Performance Indicators·KPI)를 연상케 한다. 김창근 의장도 스타일이 비슷하다. 그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그룹 가치(시가총액) 300조원을 달성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준기 회장은 올 신년사에서 주력 사업군을 꼼꼼히 나열하면서 현안과 과제를 분명히 하고 있다.

 포스코와 KT처럼 ‘주인 없는 민간기업’은 새로운 총수가 취임할 때마다 유독 새로운 어젠다를 강조해 눈길을 끈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 의욕으로 새로운 변화에 도전한다면 성공할 수 있다”(2004년 이구택 전 포스코 회장), “업(사업영역)을 진화시키고 장(활동무대)을 확대하며 동(업무방식)의 혁신을 통해 ‘포스코 3.0’ 시대를 열자”(2010년 정준양 포스코 회장), “혁신과 변화, 컨버전스의 KT를 만들자”(2010년 이석채 전 회장) 등이다. 재계 관계자는 “전임자의 흔적을 지우고 싶다는 속마음을 드러낸 것”이라며 “새로운 어젠다도 좋지만 매번 바뀌는 어젠다가 얼마나 힘 있게 조직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흥미로운 표현으로 눈길을 끈 신년사도 있다. 항공사업이 주력인 한진그룹은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하자 이듬해 신년사에서 ‘절대 안전’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이웅열(58) 코오롱 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각자 다른 개성을 가진 임직원들이 마음을 더하고 열정을 곱해 시너지를 내고 서로 힘든 것을 나누자”며 ‘더하고 곱하고 나누는 경영’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 × ÷ 배지’ 달기를 제안했다.

 신년사는 그 자체가 그룹 경영의 중요 요소이기도 하다. 한 해의 경영방침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삼성 신년사는 이건희식 ‘메시지 경영’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원고지 10장도 안 되는 분량이지만 그룹 총수의 현실 인식과 통찰력, 해법이 압축돼 있다. 90년대 초반 삼성 비서팀장을 지낸 정준명(69) 김앤장법률사무소 고문은 “신년사를 공개하기까지 준비기간이 보통 두 달 이상 걸렸다. 문구를 숱하게 고쳤다”며 “그래서 (이 회장의) 신년사는 삼성 경영의 요체”라고 정의했다. 정 고문은 이어 “이 회장은 신년사를 발표한 다음부터 이듬해 (내놓을) 신년사 문구를 고민한다. 신년사는 삼성이라는 조직과 사회, 국가에 대해 1년을 고민한 결과물”이라고 덧붙였다.

 “신년사를 발표하고 나서 한참 뒤에 (이 회장이) ‘그 표현은 조금 완곡하게 고쳤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어와 당황한 적이 있어요. 그만큼 (이 회장이) 문구 하나하나를 마음속에 품고 있다는 얘기입니다.”(정준명 고문)

 지금도 비슷하다. 삼성 고위 관계자는 “이 회장과 교감한 경영 키워드를 중심으로 미래전략실 기획팀에서 참고용 문안을 만든다”고 소개했다. 그는 이어 “인쇄·영상물 작업 등을 감안하면 12월 10일 전후로 작업이 마무리된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그 이듬해 신년사 준비가 시작된다고 보면 맞다”고 설명했다.

 이 회장의 신년사는 간결한 비유를 통한 위기의식 공유와 혁신 메시지 전달로 요약된다. 먼저 지난 20여 년간 그의 신년사에서 분명하면서도 일관되게 명시된 내용은 “위기는 과거나 지금이나 여전하다”는 것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이 회장은 93년 삼성전자를 암 환자, 삼성중공업을 영양실조 환자에 비유하면서 “변하지 않으면 망한다”고 질타했다. 지금도 표현방식이 조금 바뀌었을 뿐 위기라는 ‘진단’과 혁신이라는 ‘처방전’은 비슷하다. 삼성 관계자는 “이 회장이 취임한 이후 삼성에서 위기가 강조되지 않은 때는 거의 없었다”며 “오너가 20년 넘게 반복해서 임직원에게 위기의식을 가지라고 주문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올해는 뉘앙스가 조금 달랐다. 삼성은 이번 신년사에서 ‘위기’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지적은 보다 구체적이었다. 이 회장은 “신경영 20년간 선두 사업은 끊임없이 추격을 받고 있고 제자리걸음인 사업도 있다. 시간이 없다”며 실적이 부진한 계열사에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삼성의 사업장은 가장 안전하고 쾌적한 곳이 돼야 한다”며 지난해 발생한 화학물질 누출사고를 우회적으로 질책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 회장은 혁신의 방법으로 올해 ‘품격’을 추가했다. 이번 신년사에서 “지난 20년간 양(量)에서 질(質)로 대전환을 이루었듯 이제부터는 질을 넘어 제품과 서비스·사업의 품격과 가치를 높여나가자”고 당부했다. 지난해 6월 신경영 20주년에 발표한 내용을 거듭 언급한 것이다. 양에서 질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면 이제는 격(格)을 높이라는 주문이었다. 삼성 관계자는 “삼성에 대한 기대가 높아진 만큼 일하는 방식, 윤리의식까지 초일류가 돼야 한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원고지 10~15장 분량에 불과하지만 신년사 작성에 공을 기울이기는 다른 대기업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오너 경영인의 이름으로 발표되기 때문에 부담이 크다. 최근 재계는 오너가 신년사를, 계열사 최고경영자(CEO)가 창립 기념사를 내놓는 게 공식처럼 돼 있다.

 신년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크게 두 가지다. 현대차나 KT·효성 등은 경영실적 분석과 오너의 현장 방문 연설문, 이듬해 경제 전망 등을 토대로 실무진이 초안을 작성한다. 반면 한화 등은 회장실에서 신년사 키워드를 전달받고 나서 실무 작업에 들어간다. 전년 11월 초부터, 그러니까 새해를 맞기 두 달 전부터 기초 조사를 시작하는 것은 대부분 비슷하다. 관련 부서 임직원이 머리를 맞대고 새해 어젠다를 구체화한 다음 문구를 다듬고, 보통은 12월 사장단 회의(또는 핵심 중역회의)에서 최종안을 확정한다. 대기업에서 15년 이상 회장 연설문을 작성했던 이모씨는 “그룹 본부 및 사업부서와 한 달 넘게 미팅을 하고 회장 자택으로 팩스를 넣어 결재까지 받았지만 당일 아침에 ‘빨간 줄’이 그어지는 게 부지기수였다”고 말했다.

 연설문 작업이 두 달가량 이어지다 보니 실무진의 스트레스는 상당하다. 재계 20위권 A그룹에서 연설문 작성을 담당하는 임원은 “매년 제야의 종소리를 듣고 퇴근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B그룹의 관계자는 “신년사를 잘 쓰려면 때로는 점쟁이도 돼야 한다”고 푸념했다. 그는 “두세 줄에 불과하지만 (신년사에는) 새해 경제 전망이 들어가는데 이게 쉽지 않다. 고심 끝에 ‘올해도 먹구름이 가득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집어넣었다”고 털어놓았다. 일부 비주력 계열사나 신사업 부서에서 "우리도 신년사에서 언급해 달라”는 민원을 받기도 한다. 공식석상에서 그룹 총수의 ‘눈길’을 받고 싶다는 얘기다.

 대기업이 발표하는 신년사의 뼈대는 단순하다. 먼저 새해를 맞아 임직원을 격려하는 인사말이 나온다. 그런 다음 국내외 경제 환경을 분석·전망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엄습한 이후엔 세계적으로 저성장 기조가 굳어지고 내수시장도 위축되고 있다는 내용이 주로 들어갔다. 그런 다음에 임직원에 대한 당부사항, 대외적인 경영방침 등으로 구성된다. 재계 선두권 그룹의 김모 임원은 “내부에 대한 당부는 첫 번째, 외부에 대한 약속은 세 번째 항목을 주목해야 한다”고 귀띔했다. 왜 그럴까. 그의 말이다.

 “임직원에 대한 당부는 당연히 맨 앞에 놓인 항목이 가장 중요합니다. 다만 대외적인 약속에서는 투자 확대나 도전의식 고취 같은 ‘희망적인 내용’이 앞자리에 배치됩니다. 실제 그룹의 주력 사업 내지 수익성 강화 등은 서너 번째로 밀리게 됩니다. 그런 다음 마지막에 사회공헌활동 항목을 추가하는 거지요.”

 물론 오너가 평소 즐겨 사용하는 어휘·문장 등도 반영된다. 이건희 회장은 이해가 쉽고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문구를 선호한다고 한다. 최태원(54) SK㈜ 회장과 김승연(62) 한화그룹 회장은 다소 문학적인 문구를 신년 경영 화두로 제시해 화제가 됐다. 최 회장은 2010년부터 파부침주(破釜沈舟·기존 틀을 깨야 한다), 붕정만리(鵬程萬里·붕새를 타고 만리를 난다), 마부작침(磨斧作針·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 같은 한자성어로 된 신년사를 잇따라 발표한 바 있다. 김 회장 역시 글로벌 투자 영역 확대에 대한 의지를 담아 비극태래(否極泰來·좋지 않은 일들이 지나고 나면 좋은 일이 온다), 대사대성(大思大成·크게 생각해야 크게 이룬다) 같은 사자성어 형식의 신년사를 내놓은 적이 있다.

경영자 언어 습관 자연스럽게 배어나

 반면 조석래(79) 효성그룹 회장이나 이석채(69) 전 KT 회장은 한자식 표현은 ‘절대 사절’하는 기업인이다. 두 사람 모두 실무진에게 “가급적 쉬운 우리말로 쓰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라는 지시를 자주 한다. 방송작가 출신으로 KT에서 9년째 CEO 연설문 작성을 맡고 있는 노승희 매니저는 “평소 CEO가 자주 쓰는 단어나 언어 습관을 파악해 초안을 구성하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라며 “CEO의 말투·습관 등이 자연스럽게 기업문화에 배어드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어느 회사든 신년사 발표는 ‘큰 어른’의 몫이다. 재계 5위인 롯데는 신동빈(59) 회장이 2011년 부회장에서 승진해 그룹을 이끌고 있지만 여전히 신격호(92) 총괄회장 명의로 신년사를 발표한다. 신 총괄회장은 올해 임직원들에게 “현장에서 시장의 흐름을 끊임없이 파악하고 신속하게 대응해 경쟁력을 높이자”고 당부했다.

 신년사는 오너에게는 경영지침이고, 수천~수십만 명의 임직원에겐 행동의 준거가 된다. 대개 사보나 인트라넷 등을 통해 내용을 공유한다. 삼성은 그룹 사보가 없는 대신 사내 방송을 통해 전 세계 40만 임직원에게 생중계한다. 회사 관계자는 “신년사는 영어와 일본어·중국어 버전이 동시 제작된다”며 “(그룹 인트라넷인) ‘싱글’에도 전문이 공개되는데 댓글만 수천 건이 올라오는 등 반응이 뜨겁다”고 말했다. 현대차 등 대다수 대기업은 본사 사옥에서 시무식을 하면서 총수가 직접 신년사를 읽지만, 삼성은 계열사인 신라호텔에서 행사를 치르고 전문 성우가 낭독하는 것도 특징이다.

 재계 신년사의 비밀 또 하나. 대기업 중에는 신년사를 두 가지 버전으로 만드는 경우가 있다. 언론을 통해 공개되는 신년사는 대부분 ‘요약본’이다. 새해 덕담부터 격려, 경기 전망, 사업 계획 등이 매끄럽게 정리돼 있다. 하지만 ‘내부용’, 즉 풀 버전에서는 내용이 조금 솔직하고 거칠어진다. 재계 관계자는 “요즘이야 (두 가지가) 거의 비슷하지만 과거에는 경쟁사 실적과 대비하면서 구체적인 실행 목표를 제시하는 등 신년사 논조가 약간 살벌하기도 했다”고 귀띔했다.

최지영·이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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