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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대학생 칼럼

안녕하지 못한 동생에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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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정규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3학년

전화번호를 누르다 몇 번이고 취소버튼을 눌렀다. ‘전화해도 될까’ 하는 막연한 불안 탓이다. 마음에 들었던 그녀에게 걸고자 했던 전화가 아니다. 대학 입시 발표를 기다렸던 사촌 동생에게 안부를 묻고 싶었다. 연락이 오지 않자 대학에 모두 떨어진 게 아닐까 걱정됐다.

 붙을 만한 대학을 잘 추려주지 못한 책임이 내게 있지 않나 자책했다. 지난해 8월 무렵 고3 사촌 동생에게 대입전략을 세워줬다. 로봇공학자가 되고자 하는 동생에게 붙을 법한 로봇학과와 기계공학과에 지원하도록 했다. 전화해서 붙었는지 떨어졌는지 묻기가 어려워 이렇게 편지를 건넨다. 이 글은 내 자신과 청춘들을 다독이는 글이기도 하다.

 “형이야. 수시 쓸 때 많이 혼내고 다그쳤던 형. 연락이 안 오니 지원할 때 힘껏 응원해 줄 걸 후회되네. 걱정하다 보니 내가 너만 할 때가 기억나. 그땐 계획한 대로 인생이 풀릴 거라 기대했어. 해야 할 목록들을 작성하고 그 일을 실행에 옮길 나이를 메모장에 적어놨었지. 나중에 메모장을 들춰봤더니 삶은 바라는 대로 이뤄지지 않더라. 우연한 사건들이 터지며 삶은 굴러가더군.

 남들 다 쉬는 주말에 재수학원에 나갔지만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했어. 열등감에 사로잡혀 공부해서 장학금을 받았지만 언론사에 서류를 내니 다 떨어지더라. 17군데나. 논술시험 한 번 꼭 보고자 돈 내고라도 시험 쳤던 대학교 편입시험에 덜컥 통과했어. 언론사에서 인턴도 하고, 지금은 민간비영리단체(NPO)에서 일하게 됐어. 같이 공부했던 친구들은 반은 넘게 기자가 되었지.

 이제 나이는 20대 후반이야. 꿈은 멀어지는 듯 보여도 예전처럼 마음이 쫓기지는 않아. 이유를 생각해 보니 삶이 무계획 여행과 닮아 있을 때 행복해진다는 걸 알게 되었거든. 여름에 기차를 타고 여행을 다녀왔어. 정해놓은 목적지에 도착하려 발버둥치기보다는 발 닿는 곳에 집중했었어. 가던 길에 눈에 띄면 무작정 들렀네. 덕분에 남들이 알려준 관광명소가 아니더라도 발걸음 닿는 곳곳에서 설레며 감동했었지.

 ‘삶 여행. 목적지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과정의 흐름을 익혀라. 그리하면 지칠 때는 있어도 지겹지는 않을 것이다.’ 삶 디자이너 박활민이 쓴 글귀야. 당장 내일이 걱정되겠지만 단 하루라도 무작정 여행지를 돌아다니듯 지내면 어떨까. 일정과 목적지를 잊고, 순간순간에 몰입하는 하루. 삶을 미래에 저당 잡혀 희생하지 않으려는 ‘여행살이’인 거지. 20대인 너와 내가 여태껏 익숙하고 지루했던 삶이 낯설어지며 즐거워졌으면 하는 마음이야.

 시대가 수상하고, 다들 안녕치 못한 지금. 힘이 될지 모르겠네. 이 글을 쓰니 나 스스로는 괜찮다고 다독여지는 듯해. 너에게 용기 내서 전화할게. 우리, 여행하듯 그렇게 살자며.”

이정규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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