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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지식] 뻔뻔함·음흉함이 승리 이끈다, 후흑의 리더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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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초한지 후흑학
신동준 지음
을유문화사, 360쪽
1만5000원

멋있는 패배란 없다. 그저 이기는 게 상책이다. 비록 지저분하더라도. 손자병법에도 씌어있지 않던가. 전쟁은 속이는 게임이라고. 산을 뽑는 힘, 세상을 덮는 기상을 지녔으면 뭐하나. 항우는 쓰러지고, 사슴은 유방이 잡은 것을.

 그런데 항우는 왜 졌을까. 사마천이 『사기(史記)』에서 갈파했듯이 ‘아녀자의 어짊(婦人之仁)’ 때문인가. 끝낼 수 있는 기회가 그토록 많았는데, 허망하게도 막판 뒤집기를 당한단 말인가. 중국 CCTV의 ‘백가강단(百家講壇)’으로 유명한 왕리췬(王立群)은 ‘배신’을 꼽았다. 항우의 단점을 보완할 인물들이 모두 떠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방의 승리 비결은 용인술인가. 다다익선(多多益善) 한신이 토사구팽(兎死狗烹)될 때까지 떠나지 않은 것을 보면 말이다.

 여기에 전혀 새로운 통찰이 있다. 전쟁의 승패는 ‘뻔뻔함과 음흉함’으로 판가름이 난다는 것이다. 바로 ‘후흑학(厚黑學)’이다. 청말에 태어나 쑨원(孫文)과도 함께 한 리쭝우(李宗吾)가 내세운 이론이다. 예컨대 유방은 낯이 두껍고 속이 검은 ‘면후심흑(面厚心黑)’형이다. 항우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예의염치를 헌신짝처럼 버리며, 큰소리만 치는 동네양아치였지만 결국 민심을 얻으면서 천하를 손에 넣었다. 어쩌면 노자가 말한 ‘큰 지혜는 어리석어 보인다’의 전형일지도 모른다.

 항우는 정반대로 ‘면박심백(面薄心白)’형이다. 얼굴 가죽이 얇고 속이 담백해 빤히 보인다는 얘기다. 귀족이란 스펙, 출중한 무예로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다. 따라서 본심을 굳이 감추거나, 다른 사람의 능력을 빌릴 생각조차 없었다. 그 결과 범증도, 한신도, 진평도 잃고 천하도 놓쳤다는 것이다.

 이밖에 ‘면박심흑(面薄心黑)’으로 천하의 모사 범증과 괴철, ‘면후심백(面厚心白)’으로는 한신과 소하를 든다. 마치 마케팅전략의 ‘SWOT 분석’과 닮았다. 내면의 강점은 석탄처럼 까만 흑심, 외면의 기회는 성벽과 같은 철면피라는 얘기이다.

 저자는 후흑(厚黑)이야말로 나라를 구하는 길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조선도 턱없이 자존심만 내세운 사대부의 ‘박백(薄白)’으로 종말을 고했다는 진단이다. 지금 한반도 주변은 다시 갑오(甲午)의 격랑이 인다. 글로벌 경쟁은 갈수록 치열하다. 중국은 공공연히 ‘도광양회(韜光養晦)’를 내세운다. 스스로 드러내지 않고 참고 기다린다는, 바로 후흑(厚黑)의 요체이다. 아편전쟁의 아픔을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며, G2까지 오른 그들이 아닌가. 조조부터 모택동까지 후흑(厚黑)의 유전자가 몸에 배어 있다. 일본 역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대망(大望)의 모델이 있다. 난세엔 패도(覇道)가 횡행하는 법. 우리도 선명한 명분 못지 않게 ‘후흑의 리더십’이 필요할 때가 아닐까.

박종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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