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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책] '활자의 나라' 조선, 왜 책값은 비싸야만 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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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중앙일보와 교보문고가 함께 하는 ‘이달의 책’ 1월 주제는 ‘책의 힘, 글의 맛’입니다. 한 해를 시작하며 책 읽기의 즐거움, 글의 힘을 일깨우는 신간을 골랐습니다. 지성과 감성을 채워주는 책과 더불어 풍요로운 한 해를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한문학자 강명관 교수는 조선시대 책의 유통을 통해 지식 문화사를 탐사했다. 사진은 밀랍 조판 과정. [사진 천년의 상상]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
강명관 지음
천년의상상, 548쪽
2만5000원

읽고 싶은 책은 점점 많아지는데 책장은 턱없이 부족해지면서 전자책을 사기 시작했다. 전자책이 편리하긴 하지만, 예전에 없던 심각한 건망증이 시작됐다. 전자책으로 이 책 저 책 바꿔 읽다가, ‘이 책 제목이 뭐였더라?’ 자문하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진다. 종이책은 사람의 얼굴 같아서 한 번에 한 권밖에 대면할 수 없지만, 전자책은 기계 하나로 여러 책을 ‘멀티태스킹’ 하다보니 열심히 읽다가도 ‘저자가 누구였지?’하고 헷갈리곤 한다. 휴대폰이나 태블릿PC에 수백 권의 전자책을 저장할 순 있지만, 전자책은 ‘종이책이라는 사물’의 따스한 온도와 질감을 결코 따라갈 수 없다.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는 바로 이 종이책이 시작된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 조선시대 전체를 관통하는 방대한 책의 역사를 호쾌하게 재구성한다.

 ‘책이라는 사물의 역사’를 끊임없이 탐구하는 저자의 시선은 열정적이면서도 냉철하다. 저자는 지식의 내용을 넘어 지식이 유통되는 형식에 주목한다. 지식인이 국가와 사회의 지배층이 된 조선시대에는 어떤 방식으로 책이 유통되었는가? 인쇄하는 책은 어떻게 선별되었는가? 그것을 결정한 사람은 누구인가? 누구도 속 시원하게 대답할 수 없던 이 근원적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저자는 『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뿐 아니라 조선시대의 방대한 문집을 섭렵했다. 이 질문들의 밑바닥에는 ‘구텐베르크보다 훨씬 빨리 금속활자를 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의 인쇄문화는 서양처럼 발전할 수 없었을까’라는 결정적인 질문이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출판의 주도권을 국가가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자소와 교서관을 중심으로 강력하게 중앙집권화된 출판시스템이 지식의 대중화를 가로막은 것이다. 한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출판이 대중화되지 못했던 것은 한글을 천시하는 엘리트문화와 함께 엄청난 책값도 한몫했다. 지방수령이 자녀에게 『주자대전』을 사주기 위해 고급 면포 50필, 즉 논 2~3마지기 소출에 해당하는 거액을 지불하고도 책을 구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책의 압권은 대장경을 둘러싼 한·일 외교전의 스펙터클이다. 조선 초기 일본사신들이 한국에 오는 목적은 주로 『대장경』을 얻기 위함이었다. 해인사판 『팔만대장경』이 지금은 세계적인 문화유산이지만, 당시엔 세종조차 “대장경판은 무용지물”이라며 일본에 줘버리라고 할 정도였다. 일본은 ‘대장경판을 넘겨주지 않으면 조선을 침략하겠다’라며 강짜를 부렸다. 신하들의 반대로 간신히 『대장경』은 지켜냈지만,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실록』은 물론 대부분의 중요문서가 불타버려 고려시대와 조선초기의 소중한 지적 유산이 사라져버린 것은 뼈아픈 역사적 트라우마로 남게 되었다. 경서들이 다 타버려 과거시험조차 치를 수 없었다는 대목에 가서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분서(焚書), 책을 태우는 것만큼 학문과 예술을 향한 가혹한 형벌이 있을까.

 이 책을 읽는 동안 내 마음속에서는 이규보의 한시 ‘영정중월’(詠井中月)이 마치 은은한 배경음악처럼 흘러갔다. “달빛이 너무 탐나 물을 길어갔다가 달도 함께 담았네. 돌아와서야 응당 깨달았네. 물을 비우면 달빛도 사라진다는 것을.” 어떤 아름다운 그릇으로도 달빛을 담을 수 없듯, 책을 쓰는 이의 마음도 그렇게 아스라이 사라지기 쉬운 달빛이 아닐까. 달빛을 고스란히 비춰내는 물처럼 해맑은 영혼이 있어야만, 우리는 책의 달빛, 지은이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정여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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