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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에 살고 지고…] (4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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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바람도 발 밑에 일렁인다
머리 위의 햇빛은 밝고 하늘은 푸르고 맑았다

-손소희

큰 산봉우리가 그늘을 이루던 문학동네의 시절이 있었다. 김동리라는 높은 봉우리 곁에서 햇빛과 바람을 잘 다듬어 주던 손소희는 또 하나의 봉우리였다.

문학의 크기로나 사람의 크기로나 종가집 사랑방과 안방을 차지하고 있던 김동리.손소희 양주댁은 신당동에 있었다.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 때는 현관에 신발들이 북새를 이뤘고 평소에도 그 댁 대문은 밤낮으로 열려 있어 문인들이 내집 처럼 드나들었다.

동리 쪽이야 더 보탤 말이 없지만 손소희의 치마폭이 여성 문인들 중에 누구보다도 넓었다는 것을 만나본 이는 다 알고 있는 터다. 손소희는 1917년 함북 경성에서 태어나 함흥 영생여자고보를 졸업한다. 37년 동경 니혼대학에 입학했다가 병으로 중퇴,귀국하여 3종 교원 자격고사에 합격한다.

39년 만주로 가서 만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근무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42년에는 유치환 등과 '재만 조선인 시집'을 내기도 한다. 광복과 함께 서울로 와서 '백민'에 '맥에의 결별'을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첫 발을 내딛는다.

해방공간인 47년 손소희는 서울 명동에 다른 여성과 다방 '마돈나'를 차렸는데, 정지용.김동리.최인욱.이용악등 문인들의 사랑방이 되고 있었다. 49년에는 전숙희.조경희등과 종합지 '혜성'을 발간했으나 6.25를 만나 4호로 중단된다.

손소희가 동리를 만난 것은 '마돈나'에서 였고 서울이 함락되었을 때 미처 피난을 못간 동리가 손소희 집에 숨어 지내면서 두 사람의 사랑은 싹이 튼다.

부창부수란 이런 때 쓰는 말일까?

안방마님이 된 손소희는 억척스럽게 장.단편을 써내는 한 편 문단의 큰 일에는 언제나 발을 벗고 나섰다. 문인협회나 펜클럽 선거가 있을 때면 야전사령관으로 진두 지휘를 했고 후배 문인들을 흡사 병아리를 몰고 다니는 어미닭처럼 품안아 줬다.

자라나는 문인들이 글농사를 지을 땅이 없음을 안타까워한 나머지 동리가 73년 10월 창간한 '한국문학'의 뒷바라지도 손소희의 몫이었다.

어느날 신당동 댁엘 갔더니 손소희는 방안 가득 화구들을 늘어 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웬 화가?" 하고 물었더니 개인전을 준비 중이란다.

나는 마침 '한국미술전집'을 함께 편집하던 미술평론가 이구열 보고 그림을 보러가자고 했다. 이구열은 그의 그림이 예사스럽지 않다고 하면서 개인전을 여는 것을 좋게 생각했다.

신당동 댁 거실에는 군침 도는 그림.글씨들이 화랑처럼 걸려있었다. 그 중에도 30호가 넘는 김환기의 유화는 몹시도 나를 홀렸다.

한번은 내 앞에서 두 내외가 글씨.그림의 소유권을 놓고 네것이냐 내것이냐고 애교스런 언쟁도 했었다. 손소희는 김환기 그림을 내게 양도해주었다. 구실은 개인전 비용을 마련하겠다는 것이었지만 갖고 싶어하는 내 마음을 사준 것이리라.

나는 옛 벼루에 넋이 나가서 그림을 다시 친구에게 넘겨주고 말았지만 그 그림은 화상들이 서로 탐내는 김환기의 대표작이었다. 동리와 손잡고 문단을 통째로 경영하던 손소희는 87년 1월 7일, 동리의 품에서 고이 눈을 감는다.

이근배 <시인.한국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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