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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유주열] 마지막 황제(溥儀)와 “최종전쟁론”

중앙일보

입력

“울지 마 곧 끝난다”

중국의 중심은 베이징이다. 그리고 베이징의 중심은 자금성이다. 경산(景山)에 올라 자금성을 내려다보면 나무는 없고 고래 등 같은 황금기와의 물결을 이룬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수많은 전각들이 숨을 죽이고 있는 모습이 마치 바다 속의 용궁을 보는 것 같다.

자금성에 입장하고자 오문(午門)쪽으로 가보면 매표구 앞에 장사진이 쳐서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입장권을 구할 수 있다. 동행인이 표를 살 동안 바로 이웃의 중산(中山)공원을 둘러본다. 이곳은 본래 사직단으로 황제가 곡물의 신에게 제사 지낸 곳이라 나무들도 상록수인 수백 년 된 측백(側栢)으로 수림을 이루고 있다. 측백은 백송(白松)과 함께 늘 푸르기를 바라는 황실의 수목이다.

자금성에 입장을 해보면 중국인뿐만이 아니고 세계 도처에서 온 수많은 관광객이 가이드를 앞세우고 자금성에 대해 설명을 듣는다. 중국인 관광객은 중국어 가이드, 미국인 관광객은 영어 가이드, 일본인 관광객은 일본어 가이드로 서로 자기들 말로 곳곳에 팀을 이루어 자금성 해설을 쏟아낸다.

가이드의 해설은 대개 비슷한 내용인데 언어만 다른 셈이다. 하 라이트는 역시 “라스트 엠페러(末代皇帝)” 푸이(愛新覺羅 溥儀)의 이야기다. 푸이는 만 세 살도 되기 전인 1908년 12월2일 추운 겨울 날씨에 이곳 자금성에서 선통제로서 중국의 황제가 되었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가 감독한 “라스트 엠페러”라는 영화에는 만조백관을 늘어세운 푸이의 대관식이 스펙타클하게 펼쳐진다. 그러나 주인공인 푸이는 아버지 순친왕에게 울면서 집에 빨리 가자고 보챈다.

순친왕은 황제를 달랜다. “울지 마 조금만 참으면 곧 끝날 거야” 가이드들은 이 말이 씨가 되어 푸이는 2년 후 황제에서 물러났단다. 그를 마지막 황제로 부르는 것은 청국의 마지막 황제뿐만이 아니라 중국 역사를 통틀어서도 진(秦) 시황제(始皇帝) 이후 마지막 황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은 푸이도 시황제가 된 적이 있다. 그가 후에 괴뢰 만주국의 초대황제인 강덕제로 즉위하여 11년간 재위한 바 있기 때문이다.

가이드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한 때 중국의 맹목적인 좌파 인사가 봉건사회의 잔재인 자금성을 불태우고 그곳에 노동자를 위한 공장을 세우자고 제안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다행히도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그러한 극단적인 생각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도록 막았다고 하면서 깜짝 놀란 관광객의 가슴을 쓸어 준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이 자금성의 마지막 주인이었던 푸이가 푸순(撫順)전범관리소에 수감된 것을 특사로 풀어 주고 정치협상회의의 문사연구위원회의 전문위원으로 활동케 하면서 자서전을 쓰게 하였다. “나의 전반 인생(我的前半生 From the Emperor to Citizen)"이 그의 자서전이다. 푸이는 말년에 그를 끝까지 돌봐주던 한족 간호원과 재혼하고 신장암으로 사망한다. 그의 무덤은 청조 역대 황제의 능원인 청 서릉 인근에 있는 화룡황원(華龍皇園)에 있다.

헨리와 엘리자베드

자금성의 북서쪽에 사찰해(寺刹海)가 있고 그곳의 양지 바른 왕부(王府)가 푸이가 태어 난 곳이다. 지금은 손문의 부인으로 국모로 추앙 받은 송경령(宋慶齡)의 고거로 기념관이 되어 있는 곳이다. 아버지 순친왕은 광서 황제의 친동생이다. 1908년 세 살짜리 젖먹이가 황제로 지명되어 아버지 가슴에 안겨 자금성에 들어오게 된다. 그를 황제로 지명한 사람은 서태후였다.

푸이를 청의 마지막 황제로 만든 사람은 서태후였지만 만주국의 초대 황제로 만든 사람은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등 일본의 장교들이었다. 그리고 푸이에게 자금성 밖의 세상을 가르쳐 주고 만주인으로서 정체성을 심어 준 사람은 영국인 존스턴이다.

존스턴은 푸이가 13살이 되는 1919년 3월 황제의 가정교사(帝師)로 채용되었다. 푸이가 자금성에 들어 온지 10년이 되었고 공화정부가 들어서면서 폐위 된지도 8년이 된 해였다. 청말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의 아들로 영국대사를 지낸 이경방(李經方)이 푸이를 위해 베이징 말을 잘하는 레지날드 존스턴(1874-1938)을 추천하였다. 존스톤은 스콧트랜드 출신으로 영국정부의 식민지성의 관리로 홍콩과 산동성의 영국관활지인 포트 에드워드(지금의 웨하이)에 근무한 영국인 이었다.

당시 45세의 존스턴은 궁정의 높은 직급의 급여를 받았다. 당시 그의 집은 자금성 북문 근처에 있어 매일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였다고 한다. 존스턴은 푸이에게 영어와 함께 앞으로 서양인과의 교제에 필요한 서양 예절을 가르쳤다. 존스턴으로부터 헨리라는 이름을 얻은 푸이는 자전거 타는 법도 배우고 중국 밖의 소식도 알게 되면서 스스로 단발까지 하였다. 푸이는 1922년 완룽(婉容)과 결혼한다. 완룽은 중국의 마지막 황후가 된다.

완룽은 자신의 가정교사로는 베이징에서 태어난 이자벨 인그람(1902-1988)을 채용하였다. 이자벨은 미국인 선교사 딸로 베이징 말을 잘하고 미국 웰슬리 대학을 졸업한 인테리 여성이었다. 그들은 나이와 생김새도 비슷하여 친구처럼 지내면서 서로의 옷을 바꿔 입을 정도로 친밀하였다고 한다. 이자벨은 완룽에게 엘리자베드라는 예쁜 이름을 지어준다.

중국의 내정을 잘 아는 존스턴은 푸이가 베이징을 지배하고 있는 군벌들에게 이용되거나 또는 정적(政敵)으로 몰려 살해되는 일이 없도록 신변보호에 신경을 썼다. 중국의 권력자들 사이에는 푸이를 업고 청조(淸朝)를 다시 일으키려는 복벽(復淸) 패거리와 그것에 반대하는 공화정 일당들의 싸움이 계속되었다. 공화정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푸이가 눈의 가시였다. 더 이상 복벽의 이야기가 나올 수 없게 하고자 푸이를 제거하려는 음모도 꾸미고 있었다.

자금성 축출과 일본 공사관

존스턴이 자금성에 들어 온지 5년이 지나서 그의 가정교사 직이 끝나는 사건이 생겼다. 1924년 11월 5일 쿠데타로 집권한 풍옥상(馮玉祥)은 푸이를 자금성에서 축출하였다. 푸이가 16년전 황제 대관식 때 그렇게 돌아가고 싶었던 본가인 순친왕부로 강제 쫓겨 간 것이다. 그러나 푸이에게는 순친왕부도 위험해 보였다. 푸이는 영국이나 화란 정부의 도움으로 상하이나 텐진등 서양의 조계지에서 제대로 보호를 받고 싶었다. 존스턴은 푸이를 위해 영국 정부의 의향을 알아보았다. 푸이가 영국의 보호를 받으면 후에 완룽과 함께 런던으로 유학을 갈 수도 있었다. 완룽도 이자벨을 통해 세상을 좀 더 알기위해 해외유학을 바라고 있었다.

존스턴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영국정부는 중국의 내정에 말려 들어가지 않겠다고 거절을 하였다. 만일 영국정부가 푸이 내외를 받아 들였다면 중국의 근대사 달라지거나 일본의 괴뢰 만주국 건설에 차질이 발생했을지 모른다.

존스턴은 난감했다. 푸이를 위해 어딘가 피신처를 찾아야 했다. 존스턴은 일본공사관에 탐문했다. 당시 존스턴은 일본은 영국처럼 아시아의 신사의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일본의 베이징 주재 요시자와(芳澤謙吉)공사는 푸이의 보호를 받아 들였다. 요시자와 공사는 1년 전인 1923년 도쿄를 황폐화 시킨 관동대지진 때 푸이가 거금 20만 달러를 구호기금으로 선뜻 내 준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에게는 또 하나의 정략적인 목적이 있었다. 1900년 초 러시아처럼 소련의 남진을 우려하고 있는 일본은 소련과 한반도 사이에 놓여 있는 만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만주족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가 언젠가 필요로 할 재화(財貨)가 될 것으로 믿고 받아 들였는지 모른다. 존스턴은 11월29일 푸이 내외를 자동차에 태우고 순친 왕부를 출발하여 일본 공사관으로 갔다. 순친왕부와 일본 공사관은 자금성을 반 바퀴 정도 도는 짧은 거리에 있었다. 요시자와 공사는 푸이 내외에게 자신의 침실을 내주는 등 극진하게 대우하였다.

만주국의 설계도 “최종전쟁론”

푸이 내외는 일본공사관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1925년 2월 27일 그들은 텐진의 일본 조계지역으로 옮겨 갔다. 푸이는 후에 잉코우구(營口)를 거쳐 뤼순(旅順)으로 갈 때까지 6년간 텐진에 체류하였다. 일본의 영관급 장교 3인방은 텐진에 체류하고 있는 푸이를 이용 장작림(張作霖) 폭살사건 후 만주지역의 힘을 공백을 메우고자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賢二)(1883-1948) 대령, 이다카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1885-1948) 대령 그리고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1889-1949) 중령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푸의를 황제로 괴뢰 만주국을 세워 일본제국의 울타리로 삼아 남진하는 소련과 한반도 사이의 완충지역을 만들 것을 생각한 사람들이다.

사실 만주국을 설계한 사람은 후에 “최종전쟁론”을 저술한 이시하라 간지였다. 이시하라 간지는 일본 불교의 일파인 니치렌(日蓮宗) 신도로 일본 육군의 이단아(異端兒)라는 별명처럼 특별한 인생을 살다 간 사람이다. 그는 일본 장교의 출세 관문인 일본 육사(1909)와 육군대학(1918)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주독일 일본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하면서 본격적인 유럽의 군사학을 공부하게 된다. 그의 “최종전쟁론”은 독일에서 형성된다. 그의 기본 사상은 황인종의 대표인 일본이 백인종의 대표인 미국과 최후의 전쟁을 통해 미국을 패배시킨 후 일본이 니치렌의 교리와 같이 세계의 중심이 되는 황금시대를 구가한다는 허황된 생각이었다. 미국과의 전쟁이야 말로 “최종전쟁”으로 이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자원을 확보하고 군대를 양성해야 하는 등 치밀한 준비를 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즉 “작은 전쟁으로 큰(최종)전쟁을 지원한다”는 전략이었다.

일본은 우선 공산혁명으로 성장의 엔진을 갖춘 소련이 과거 제정 러시아처럼 동아시아로 남진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 이는 장작림 폭살사건이후 힘의 공백이 생긴 만주지역을 선점하여 만주의 자원을 가지고 전쟁을 통해 소련을 격퇴시킨다. 그리고 만주를 안정시킨 후 또 하나의 자원부국 동남아로 진출하여 영국 화란 등 유럽세력과 다시 전쟁을 통하여 동남아를 해방시킨다. 그리고 두 지역에서 확보된 자원을 집중시켜 미국과 최종전쟁을 한다는 와일드한 시나리오였다.

이시하라는 이러한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관동군 참모로 다렌(大連)의 관동군 사령부에 1928년 부임한다. 장작림 폭살 사건에 책임을 지고 물러난 가와모토(河本大作)대령의 후임이었다. 이시하라는 상관인 특무 정보대장 도이하라 겐지, 참모장 이다카키 세이시로의 지원을 받아 만주국 건설의 계획을 진행한다.

우선 만주에 주둔하고 있는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張學良) 군대를 제거하고 만주를 손안에 넣는 것이다. 장학량 군대와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사건을 만든다. 상관 이타카키와 함께 봉천(지금의 심양)시 근교의 류타호(柳條湖)근처의 철도(滿鐵)를 폭파한다. 1931년 9월18일 미명의 일이다. 이는 1928년 6월4일 봉천시 인근 철로에 폭약을 설치 세상을 요란하게 만든 장작림을 폭살 사건 후 3년 3개월만의 도발이었다.

이시하라는 도쿄에 보고하지 않고 나폴레옹의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전광석화의 전술로 불과 1만의 병력으로 23만의 장학량군대를 무력화시키고 만주 주요도시를 점령한다. 가장 핵심의 봉천의 치안을 확보하기 위해 도이하라를 봉천 시 임시시장으로 앉힌다. 그리고 1932년 3월1일 푸이를 집정(나중에 황제)으로 새로운 수도 신경(長春)에서 만주국 수립을 내외에 선포한다.

만주사변으로 알려진 일본 영관급 장교들의 폭거는 국제적 문제를 야기 시켰으나 일본은 이 작전을 통해 만주를 손에 넣고 괴뢰국가 만주국을 세울 수 있었다.

이시하라의 친중(親中) 반소(反蘇)정책

이시하라 중령은 그 후 승승장구하여 중일(中日)사변이 일어난 1937년에는 소장으로 승진되어 있었다. 이시하라 소장은 중일전쟁에 반대하였다. 일본 군부의 만주파(滿洲派)를 이끌고 있는 이시하라는 중국과 전쟁을 할 때가 아니다 라는 것이다. 자신의 최종전쟁론에 근거하여 우선 소련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배후인 중국과 우호관계(親中)를 유지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시하라는 중일전선을 확대하려는 부하들의 참전을 막았고 이것이 군 수뇌부와 마찰을 일으켰다. 그는 요직에서 해임되어 도조 히데키(東條英機)가 참모장으로 있는 관동군 부참모장으로 좌천된다. 이시하라는 원대한 비전 없이 눈앞의 이익에 몰두하여 중국과의 전쟁을 추진하는 도조 참모장과 사사건건 부딪친다.

1941년 10월 수상이 된 도조가 진주만을 기습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자 준비 안 된 상태에서 이길 수 없는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한다. 그리고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하려고 하는 도조를 “국가의 적”이라고 공개 비판한다. 그는 동남아의 점령으로 충분히 군대를 양육하지 않은 상황에서 최종 전쟁의 상대인 미국과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것이다. 이시하라는 성급한 대미전(對美戰)을 “기름 때문에 시작하는 어리석은 전쟁”으로 비판한 것이다. 그는 강제 예편된다.

이시하라는 만주침략의 주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도조와 앙숙관계였던 탓에 전후 전범재판소에 기소되지 않았다. 중국의 장개석(蔣介石) 정부는 이시하라의 전범처리를 강력히 요구했지만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의 상관이었던 도조 히데키, 도이하라 겐지, 이타기키 세이시로등 모두 A급 전범에 회부되어 사형당한 것과 운명이 달랐다. 이시하라는 고향 야마카다(山形)로 돌아 가 저술활동을 하며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

일본이 미국과의 태평양전쟁에 함몰되어 막강한 관동군이 태평양전선으로 빠져 나가 만주국이 사실상 무장해제 되어 있음을 알게 된 소련은 일소(日蘇)중립조약을 깨고 만주국을 공격한다. 1945년 8월 봉천의 공항에서 탈출코자 한 만주국 황제 푸이와 완룽은 소련 공병대에 의해 전범으로 체포된다. 그들은 연길 감옥에 구금된다. 완룽은 1946년 6월 감옥에서 병사하고 푸이는 1950년 중국에 신병이 인도된다. 푸이는 그 후 전범에서 특별 사면되고 중국 정부의 보호 아래 1967년10월 병사한다.

유주열 전 베이징 총영사=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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