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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교 25년의 진화-박대통령의 「6·23」특별선언을 계기로 되돌아 본 변천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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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평화통일외교정책에 관한 박대통령의 특별선언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우리외교의 일대전환을 의미한다. 여지껏 우리만의 독무대였던 「유엔」 및 국제기구에 북한을 인용한 사실, 북한과 관계를 갖고 있는 공산권에 대해서도 수교외교를 전개하겠다는 적극 문호개방이란 점에서 그렇다. 특히 휴전선 이북지역을 사실상 지배하는 공산정권이 있다는 현실인 점에서 출발한 이번 조치는 적극문호개방의 성격상 「할슈타인」원칙의 대 수정을 가져올게 틀림없다. 긴장완화와 국제협조방향으로 가고있는 국제정세를 배경으로 그 현실에 대처하면서 평화를 한반도에 고착시키려는 이번 성명은 우리외교방년사상 가장 전향적인 의미를 갖는다.

<정책기조4기>
48년 정부수립이후 우리외교는 ▲승인획득외교 ▲국가보존외교 ▲대 중립국 적극외교 ▲대 공산권 외교전개라는 방향으로 점차 폭을 키워왔다.
이러한 우리정부의 외교는 통일이라는 국가기본목표와 한반도에서의 한국의 유일합법성고수 및 2개의 한국관 불용인을 그 기조로 한다.
외교의 내포를 넓혀온 단계는 대체로 40년대·50연대·60연대·70년대의 연대구분과 일치한다.
▲40년대 승인외교기=1948년12월l2일 「유엔」총회는 대한민국정부를 한국에 있어서의 유일합법 정부로 선언하고 세계각국이 한국정부와 관계를 수립하는데 있어 이 사실을 고려하도록 권고했다.
이 결의이후 50년 6·25사변까지 한국외교의 초미의 관심사는 국가승인 획득이었다.
49년1월1일 미국을 선두로 50년3월까지 중국·영국·「프랑스」등 25개국이 우리를 승인했다.
▲50년대 우방 일?외교=북한이 일으킨 6·25남침에서 우리를 구해준 공로는 「유엔」과 미국을 비롯한 참전16개국에 돌릴 수밖에 없다. 반면 북한의 남침을 정신·물질적으로 도운 공산권은 말할 것도 없고 소위 비동맹중립국마저 경원해야할 존재다-50년대를 관유한 우리외교의 논리였다.
따라서 친미·친 서방외교정책으로 일관했으며 일반적으로 중립국을 경원하는 소극적 외교를 폈다.
「유엔」회원국의 분포도 서방측에 극히 유리했기 때문에 한국대표단이 「유엔」정치위의 한국문제토의에 초청돼 ⓛ남북한 토착인구비례의 자유선거로 통일정부를 수립 ②「언커크」 및 「유엔」군의 계속주둔 ③북한의 도발행위 규탄을 매년 반복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60연대 대 중립국외교=5·16혁명 후 우리외교의 새로운 추가목표는 한·일 국교정상화와 대 중립국 적극외교. 특히 대 중립외교는 60년에 대거 독립한 「아프리카」신생국들이 비동맹중립노선을 취했기 때문에 불가피한 국제추세였다.
61년8월24일 『국제적 중립주의국가와의 외교관계수립을 도모한다』는 외교정책 발표를 깃 점으로 아·아 중립국에 외교 망을 확장하고 의료기술협력 망을 만들었다.
62년부터 70년까지 새로 세워진 공관은 아·중동지역만 상주대사관11, 대표부1, 겸임대사관18, 총 영사관 1개에 달한다.
특히 북한과 대사관계를 갖고있는 「인도네시아」 에 총 영사관을 둔 것도 이시기다.
▲70년대 대 공산단 적극외교=70년8월15일 박 대통령의 8·15선언이후 우리외교는 대 공산권 탐색을 조용히 시동했다.
이러한 공산권 적극자세는 대 동구권 교역추진→비적성 공산국과의 관계개선용의 표명→비 적대국으로 대상확대→남북적 회담제의(이상71년)→7·4남북·성명(72년)→정치체제와 이념을 초월해 모든 국가와의 관계개선용의 표명(73년4월)으로 이어간다.
이번 박 대통령의 한국의 문호개방 및 공산권 문호개방 촉구 선언은 우리의 대 공산권적극외교의 분기점이 될 것 같다.

<할슈타인원칙의 퇴화>
정부수립이후 25년 동안의 한국외교진화는 「할슈타인」원칙의 적용에서 징표된다. 54년 서독의 「할슈타인」외무차관이 성명한 이 원칙은 동독과 수교한 국가와는 외교관계를 갖지 않는다는 정통성 주장이다.
우리정부는 「할슈타인」원칙이 명명되기 전부터도 대한민국의 유일 합법성 및 「두개의 한국관」불용인을 외교의 기본으로 삼아왔다. 다만 50년대에는 우방과만 외교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이 원칙이 원용될 여지가 없었을 뿐이다.
대 중립국외교를 본격화한 60년대에 들어서 「할슈타인」원칙이 실제적으로 활용된다. 그러나 그 적용은 국제정세변화에 따라 60연대의 강경 적용에서 70년대의 신축적용으로 유연성이 가해졌다. 이러한 「할슈타인」원칙적용의 유연화 과정은 우리외교 변화과정의 한 단면이라고 볼 수 있다.
▲64년12월10일 정부는 북한을 승인한 「모리타니」와 단교했다. 최초의 단교조치를 취하면서 정부는 『대한민국정부만이 모든 한국 민의 자유의사를 대표하는 유일 합법정부이며 한반도에서 어느 다른 정부의 승인으로 이끌 어떤 행위도 반박한다』고 설명했다.
▲65년5월11일 북한을 승인한 「브라자빌·콩고」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상주대사관을 철수.
▲68년11월에 우리와 외교관계를 맺은 적도 「기니」가 69년9월 북한과 수교하자 「아그레망」까지 온 주 적도 「기니」대사의 파견을 중지, 사실상 단교조치를 취했다.
▲72년6월 북한과 대사급 국교를 맺은 「칠레」로부터 강춘희 주「칠레」대사를 정무협의형식으로 소환했으나 대사관은 그대로 존치.
▲72년9월부터 금년 초까지 북한대사관이 설치된 「아프리카」의 「카메룬」 「우간다」 「자이레」에 있는 우리대사와·상주 대사관은 그대로 병존.
▲73년4월 북한과 수교한 「스웨덴」에서 채명신 대사만 정무협의 형식으로 소환.
▲73년5월 「덴마크」가 북한과 수교함에 따라 「아그레망」이 온 주「덴마크」대사의 임명조치를 보류했다.
현재까지 남북한의 외교관계수립국수는 각기 지대기에 이른다.
이중 「칠레」「아르헨티나」「맬다이브」「스웨덴」「덴마크」「아이슬란드」「이란」 「우간다」「카메룬」「자이레」「세네갈」「다오메」「말라가시」「루안다」「시에라리온」「트고」「오트불타」「모리셔스」「노르웨이」 등 19개국은 남북한과 모두 외교관계를 갖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66개국은 한국과만, 소련 등 34개국은 북한과만 외교관계를 맺고있다.
현재까지 남북한 양쪽과 외교 관계를 가진 나라는 모두 우리와만 국교를 맺었다가 작년과 금년사이에 북한이 들어온 경우뿐이다. 북한은 특히 7·4성명이후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대화를 악용, 국제적으로 「두개의 한국」고정화를 가져올 수교외교를 강화해왔다.
6·23성명이후 우리도 필요에 따라 북한수교국에 적극 진출하리라 예상된다. 이달 초 국교수립에 원칙 합의한 「인도네시아」가 그 첫「케이스」가 될 것으로 보인다.

<유엔정책의 변조>
정부수립과 6·25사변과정에서 후견역을 한 「유엔」은 한국외교의 주요활동 무대였다. 지금까지 북한은 이 무대에의 진출이 철저히 봉쇄되었다.
그러나 60연대이후 신생 회원국의 대거 가입으로 북한의 진출봉쇄전략은 점점 힘들어져 온게 사실이며 우리의 「유엔」대책의 변화 과정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다.
「유엔」이 지난25년 우리의 독무대이긴 했으나 소련의 거부권 행사로 단독가입만은 불가능했다. 우리정부는 70년대까지 「유엔」가입노력을 해오다가 단독가입이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남북동시가입은 원치 않았기 때문에 50연대 말부터 가입노력을 포기했다.
▲「유엔」가입추진과정=정부수립직후인 49년1월 정부는 제1차 「유엔」가입신청서를 「유엔」사무총장에게 제출했다. 이 가입신청은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소련의 거부로 부결됐다. 「유엔」총회는 그해 11월과 50년12월 한국가입신청을 안보리에 재심토록 결의했으나 처리되지 않았다.
정부는 또다시 51년12월 제2차 가입신청을 냈다. 한국의 가입신청서는 다른 여러 신생국의 가입 신청서와 함께 처리되지 않고 미루어져 오다가 55년 16개국 일괄 가입시 분단국이란 이유로 소련이 또 거부권을 행사했다. 「유엔」총회는 57년2월 한국과 월남의 가입 재심의 요청결의를 했으나 그해 9월 안보리에서 소련의 거부로 또 다시 부결되었다.
▲「유엔」대책의 흐름=한마디로 지금까지 우리의 「유엔」대책의 목표는 한국정부의 유일 합법성을 재확인하마 북한의 진출을 봉쇄하자는 것이었다. 한국문제가 토의된 70년까지 「유엔」총회는 한국대표만을 초청해 「언커크」의 통한결의안을 채택하고 공산측이 제출하는 「언커크」해체안과 「유엔」군 철수 안을 반복 부결해 왔다. 그러나 「유엔」의 세력분포변화로 한국단독 초청은 60연대후반부터 힘들어졌다.
66년 제21차 총회부터 「유엔」의 권위·권능 수락시 북한초청이라는 이른바 조건부 동시 초청 안이 나오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68년에 창안된 재량강정제도는 우리측이 능동적 입장에서 그때의 정세에 따라 신축성 있게 「유엔」외교를 벌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 제도는 공산측의 요청으로 매년 한국문제가 제기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별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원천적으로 한국문제토의를 하지 않고도 종전 결강의 효과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71년과 72년에 쓰여진 토의연기 방식이다. 토의연기 안이 제안된 71년은 중공이 「유엔」에 가입한 대변화의 시기와 일치한다. 「유엔」대책이나 국제기구에서의 활동은 평화통일과 전쟁재발방지라는 외교목표를 달성키 위한 수단인 이상 그때 그때의 국제정세에 따라 가변적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동·서독이 「유엔」에 가입할 73년은 우리의 「유엔」외교에서도 대 격변이 불가피한 시기다. 박 대통령의 남북한 「유엔」동시가입 및 동시초청 부반대 성명은 이러한 현실을 기초로 하고 있다. 다만 수단으로서의 「유엔」대책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현 단계에서 분명한 사실은 공산 측이 오래 전부터 들고 나온 미군철수문제는 미군의 주둔이 한반도의 전쟁재발을 막는 저지력이 되므로 양보할 수 없는 외교목표라는 점이다. <성병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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