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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1)휴전회담(후반부)(1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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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이승만 대통령은 포로송환 문제로 휴전 본 회담이 무기휴회 중이었던 53년 초에 반공포로 석방 결심을 최초로 원용덕 헌병 총사령관에게 밝혔다.
한국군도 「유엔」군의 일원으로 모든 작전 지휘권이 「마크·클라크」사령관에게 속해 있어 대통령의 군 통수권이 유명무실한 상태였던 만큼 이대통령은 그러한 중대결의를 친위대격인 헌병총사령부에 제1차적으로 지시, 원용덕 장군을 거사의 지휘자로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원래 헌총사라는 것은 군 정식 편제에도 들어 있지 않은 부대로서 「유엔」군사령관→한국군 참모총장의 작명이나 지휘를 받지 않는 이대통령 직속의 특수부대였다. 이대통령으로서는 이미 이 부대의 충성이나 능력은 52년 여름의 정치파동 처리를 통해 익히 알고 철저히 믿게 되었다. 따라서 이대통령이 「극비」속에서 추진할 수밖에 없었던 반공포로 석방에 대한 모의나 작전계획 수립을 헌병 총사령부 중심으로 추진한다는 것은 부득이한, 그리고 현명한 조처였다.

<「만」자 사인 보이며 협조 구해>
문제는 각 수용소의 경비를 맡고 있는 육군헌병사령부 소속의 헌병들을 「정식지휘계통」을 안 거치고 전혀 지휘권이 없는 헌총사가 포로 석방작전에 어떻게 동원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헌총사와 육군헌병사의 수뇌부가 각기 입장이 달랐지만 석방작전에서 비교적 협조가 잘되었고 특히 실제 실행에 임한 말단 장병들은 뜨거운 민족애를 발휘, 반공포로들의 수용소 탈출을 용감하게 지원했다.
대미군 관계와 정식지휘 계통을 염원에 육헌사 수뇌들의 난처한 입장을 고려한 원용덕 장군은 설득과 때로는 위협 등 갖가지 방법을 쓰고 최후적으로는 이대통령의 「만」자 「사인」까지 내보여 협력을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하여튼 석방모의와 탈출지원 작전에 개입한 정부각료나 군장성은 진헌식 내무·갈홍기 공보처장·원용덕·최덕신 장군 뿐이었고 큰 병력도 없는 헌총사가 일선에 나섰지만 결과적으로는 반공포로 2만7천명의 탈출이라는 대전과를 올려 세계만방에 자유의 승전고를 울려 퍼지게 했다.
그러면 이번에는 반공포로 석방의 주역이었던 헌총사의 활약상을 당시 간부들로부터 들어보겠다.
▲문종욱씨(당시 헌총사 총무처장·대령=예비역육군대령·현 익성물산사장·51) <53년초 하루는 이승만대통령이 원용덕 장군을 부르더니 『반공포로들을 자유롭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다고 생각하나?』라는 아주 함축성 있는 말씀을 하셨대요.
원 장군은 이 얘기를 듣고 와서는 자기 방에 들어앉아 눈을 감은 채 깊은 생각에 잠겨 대통령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내고 자기가 취할 행동방침을 결정하려고 했어요.
3일만에 원 장군은 「석방」이냐 「수용소접수」냐의 둘중 하나를 택해야 되는데 접수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다음날 원 장군이 경무대로 들어가 계획서를 내놓고 「결심」을 밝혔더니 『잘해보아』하면서 「만」자 「사인」을 해 주더래요. 이러한 사실들은 헌총사의 간부들도 몇 사람밖에 모르는 극비사항이었어요.
국방장관이나 육참총장에게도 전혀 알려주지 않았어요.
그후 원 장군은 수용소접수작명을 만들어 봉투에 넣고 극비「스탬프」를 찍어 봉한 다음 헌총사 과장급인 김종호 황동준 중령 등 5명을 불러 별명이 있을 때까지 절대 안 뜯어보겠다는 서약서까지 받고 각 반공포로수용소 한국군 경비헌병대장들에게 직접 전달시켰어요.

<미군용 안심시키는 술책 쓰고>
얼마 후 내가 원장군의 명령을 받고 작명의 누설여부와 작전전개 때 미군과의 충돌에서 있을 희생정도를 예진하기 위해 각 수용소 경비대장 등을 순회 면담했어요.
돌아 다녀보니 미군당국은 한국군 경비대 장교들의 수용소 내 출입을 일체 금지시켜놨고 간부포로들을 모두 특수감방에다 별도 수용해 놓는 등 눈치가 심상치 않습디다.
순회결과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이런 상태 하에서는 안되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더니 원 사령관은 미군들을 안심시킬 목적으로 다시 『미군당국과 협력해서 가일층 포로경비에 만전을 기하라』는 술책적인 작명을 내립디다.
그리고 나더니 이번에는 접수원안을 약간 수정한 「반공포로 석방안」을 갖고 이대통령을 방문, 다시 「사인」을 받아오데요.
원 장군은 6·18석방 1주일 전쯤 해서 미군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각 수용소 경비대의 부대장들을 헌총사령부로 불러 올려 이대통령의 만자 「사인」이 있는 작명서를 보여주고 명령을 이행치 않으면 극형에 처하겠다면서 강력한 지시를 내립디다.
그런데 당시 반공포로석방 문제를 둘러싸고 헌총사와 육군 헌병사간에는 약간 미묘한 관계가 있었어요.
「D데이」를 앞두고 원 사령관은 대구의 육군헌병사령부 지휘관 3명을 회의를 하겠다고 헌총사로 불러 올려 시간을 끌면서 외부와의 접촉을 끊어놨어요.
이것은 육군헌사 소속인 수용소 경비헌병들을 지휘계통도 아닌 헌총사가 비밀리에 특수지휘를 하자니 어쩔 수 없이 취했던 비상조치였던 겁니다.
원 장군은 「유엔」사령관의 작명 지휘를 받는 육참총장이나 그 예하의 육군헌병사령관은 물론 국방장관에게까지도 그들의 대미군 관계를 고려, 애초부터 포로석방 계획을 일체 비밀에 붙였어요.
헌총의 포로석방 지령이 자기들 직속지휘체계의 작명이 아니었기 때문에 육군헌사 간부나 수용소 경비헌병 대장들에게 척척 먹혀 들어가지 않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원 사령관의 기술적인 조정과 헌사 고급장교들의 과감한 애국적인 협조로 작전 전개상의 모든 애로는 쉽사리 극복될 수 있었읍니다.
수용소경비 헌병대장들 중에는 정식명령계통서는 아무런 명령이 없는 채 원 사령관이 대통령을 업고 미군들을 제지하면서 포로들을 석방시키라니까 결단을 내리는데 무척 고민을 한 사람들도 있었던 모양입디다.
18일 새벽 1시쯤부터는 각 수용소에서 50%, 80%, 90%를 석방했다는 보고들이 속속 들어 옵디다. 이 「뉴스」가 전해지자 「유엔」참전국들은 물론 전세계가 발칵 뒤집혔고 미군사령관은 한국군 경비대장들을 모두 체포하고 또 한국경찰은 탈출포로를 다시 잡아들이라고 을러댑디다. 그러나 경비대장들은 모두 숨어버렸고 경찰이 포로들을 잡아들일 턱도 없었지요.>
▲최세경씨(당시 헌총사편제과장·소령=현 국회의원·공화·50) <52년5월 급조된 헌총사는 대부분의 간부장교들이 일선전투에 나가있던 사람들이라 일반 행정상 포로는 내가 원용덕 사령관을 많이 보좌했읍니다.
53년5월 하루는 원 장군이 부르더니 일어판 국제법 책 한 권을 주면서 포로문제에 대한 연구를 좀 해보라고 합디다.
나는 원 장군의 뜻을 대강 알아차리고 그 책을 하숙집으로 가지고 들어가 첫 장을 펴봤더니 「포로는 인도주의 정신에 입각해서 처우해야 된다」고 써 있더군요.
모든 것은 이말 한마디면 다되겠기에 나머지는 대충 훑어보고 책을 덮어 버렸어요.

<정식명령 계통 아니라 고민도>
다음날 원 사령관 방으로 들어가 「세계사상 포로가 본국귀환을 거부한 예도 거의 없거니와 공산주의가 싫고 또는 월남한 가족들과 함께 살기 위해 한사코 안가겠다는 반공포로들을 강제송환 시킨다는 것은 한마디로 포로대우를 규정한 「제네바」협정의 인도주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입니다」라고 서두를 꺼내고 「수용소 관리는 미군이 하지만 경비는 주로 한국군이 하고 있으니까 국군경비를 해제시킴과 동시에 반공포로들을 탈출케 하는 것이 제일 쉬운 석방 방법이겠다」고 연구결과(?)를 보고했읍니다.
내가 「경비해제」를 건의하니까 원 장군은 무릎을 탁 치면서 빙그레 웃읍디다.
6월16일 저녁에는 퇴근 후 무교동 대폿집서 친구와 얼근히 마시고 밤늦게 하숙집에 들어가자는 동안에 비상이 걸렸지만 주인이 내가 하도 곤하게 자니까 깨우지 않았어요. 아침에 일어나 비상이야기를 듣고, 그대로 달려갔어요.
참모장한테 어제 저녁의 비상내용이 무엇이었느냐고 물으니까 빙긋이 웃으면서 『왜 그리 술만 퍼마시고 다니느냐』고 놀려 대더군요.
알고 보니 원 사령관이 일부 처·과장들만 지명 비상을 걸어 반공포로 석방 계획과 행동지침 등 작전전개를 지시한 중대「비상」이었어요.
아차 하는 생각이 들데요. 그러니까 원 사령관은 내가 건의한 경비해제안을 경무대에 들어가 이대통령한테 「사인」을 받아 가지고 나와 즉시 비상을 걸어 사령부 간부들에게 알려줌과 동시에 각 수용소 헌병대장들에게는 「포로석방에 대해서는 이대로 하라」라는 지령문을 밀사들을 시켜 발송했던 거예요.

<거제·부평, 밀사 못 보내 차질>
말을 잘 안 듣는 헌병대장은 그 지역 위수사령관을 동원, 설득시키도록 지시했더군요.
내가 16일 밤 비상에 못나감으로써 헌총사의 석방작전명령 하달에 한가지 중대한 실수를 범했어요. 부산거제와 부평수용소에는 모르고 밀사를 안보냈읍디다. 원래 수용소 현황파악 임무는 내 소관이었는데 밀사파견을 지휘한 장교가 이 두 곳에는 수용소가 없는 줄로 알았던 모양이예요.
그래서 두 수용소에 부랴부랴 지령을 추가 하달하느라고 아주 애를 먹었읍니다. 결과적으로 양 수용소는 석방행동 개시가 지연됐고 특히 부산에서는 상당수의 반공포로들이 미군 저지사격으로 다쳤어요.
나는 지금까지도 이에 대한 책임을 깊이 느끼고 있읍니다.
18일 아침 포로석방「뉴스」가 전파에 흘러 나가자 학생들이 헌총사 앞에 운집, 원용덕 장군 만세를 부르며 박수들을 쳐댑디다.>
◆주요일지(1953년3월25일∼28일)
※25일 ▲불모고지서 격전 계속 ▲이대통령 서부전선의 미 해병대 시찰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 대북 방문코 군사회담 ▲「아데나워」서독수상, 소련은 아직 30만의 독일군 포로 억류중이라 주장.
※26일 ▲아군, 불모고지서 철수 ▲「아이젠하워」대통령, 주한미군의 탄약 부족설 부인.
※27일 ▲중공군, 서부전선서도 공세 ▲미 공군, 불모고지를 맹폭 ▲거제도 수용소서 도주기도 포로 2명 피살.
※28일 ▲휴전회담 공산측 대표, 김일성, 팽덕회의 「클라크」대장에 보내는 회서 전달 내용은 상병포로 교환토의를 수락 ▲진헌식 내무, 「유엔」군 고용으로 인천에 상륙한 일본인들에 퇴거령 ▲「스티븐슨」미 육군장관, 탄약 부족설 조사코자 한국 향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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