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무공무원 김모(당시 44세)씨가 아파트 22층 아들의 방 창문에서 뛰어내린 건 2009년 11월 29일 새벽이었다. 김씨의 바지 주머니에선 유서가 발견됐다.
‘○○ 엄마 미안하오! 일은 계속 떨어지는데 직원은 보내주지 않고, 팀장은 욕만 먹고…. 한직에서 고생하는 직원을 우대해줘야 합니다. 내가 죽는 이유는 사무실의 업무과다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이란 것을 확실히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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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의 부인 심모(45)씨는 이 유서를 근거로 “유족보상금을 달라”며 공무원연금공단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김씨의 불면증 치료 내역, 직장 내부 조사자료, “우울증으로 추정된다”는 병원 감정기록도 법원에 제출했다. 김씨에 관한 기록은 모두 서류로 제출됐다. 하지만 지난해 7월 1심 재판부는 심씨의 청구를 기각했다. “업무과다가 우울증의 발병 계기는 될 수 있어도 자살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볼 수 없다. 김씨의 유서 내용은 김씨 스스로 생각하는 자살 원인일 뿐 의학적으로 인정될 수 없다”는 이유였다.
2심을 맡은 서울고법 행정9부(부장 박형남)는 1심 재판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1심에 제출된 감정서류만으로 김씨의 사망 원인을 추정하기엔 부족하다고 봤다. 김씨가 생전에 우울증 치료를 받지 않아 제대로 감정할 수 없었다는 점도 고려했다. 그래서 국내 최초로 ‘심리적 부검’을 하기로 결정했다.
법원행정처는 감정인으로 민성호(51·정신건강의학) 연세대 원주의대 교수를 추천했다. 1000여 건 이상의 자살 사례를 연구한 우울증 분야의 전문가였다. 민 교수는 김씨의 유족 4명과 직장 동료 3명 등 7명을 10시간 동안 면담했다. 이를 통해 ▶김씨가 직장에서 “일은 많은데 직원이 없어 너무 힘들다. 죽고 싶다”는 말을 수시로 했다는 것을 밝혀냈다. 면담 결과 ▶자살 직전 부하 직원에게 “몸이 힘들어 병원에 입원해야 할 것 같다”고 전화했다가 심씨에게 “일이 많아 출근해야 할 것 같다”고 했고 ▶자살 직전 34인치였던 허리둘레가 31인치로 줄었을 정도로 식욕을 잃었다는 점 등도 확인됐다.
민 교수는 재판에 출석해 “김씨가 개인적·경제적 이유 없이 순수하게 업무상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 때문에 자살했다”고 진술했다. 민 교수는 “많아야 한두 명 만나고 조사를 마치는 것과 달리 법원 명령에 따라 훨씬 많은 사람을 깊이 만났다”고 말했다. 그는 “의료인과 법조인은 보는 시각이 다를 수 있다”며 “자살 사례를 많이 연구했기 때문에 숨진 지 4년 지난 김씨의 심리상태에 대해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고 했다. 심씨와 공단 측은 민 교수를 2시간 동안 신문하며 공방을 벌였다.
2심 재판부는 1심을 깨고 “공단 측이 유족보상금을 지급하라”며 원고 승소 판결했다고 22일 밝혔다. 재판부는 “김씨가 중증의 우울증으로 정신적 억제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 상태에서 업무상 스트레스를 받고 자살이란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며 “업무와 사망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박 부장판사는 “사법부가 자살 원인을 서류로만 판단하지 않고 보다 정밀하게 들여다봤다는 의미가 있다”며 “미국·핀란드 등 선진국 법원에선 심리적 부검 결과에 대해 원칙적으로 존중한다”고 설명했다. 한 변호사는 “심리적 부검은 과거의 기억을 바탕으로 부검한다는 점, 망자(亡者)에 대해선 우호적으로 진술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감안해 신중하게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기환 기자
◆심리적 부검(Psychological Autopsy)=사망 원인을 심리학·과학적으로 규명하는 것. 시신을 생물학적으로 부검하는 신체적 부검과 구별된다. 법원 명령에 따라 선정한 감정인이 주변인(유족·동료·의료진 등)을 면담하고, 유서·근무(학업) 기록 등 모든 활용 가능한 자료를 조사·검토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