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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판결 예고됐는데 … 고용부, 대책 없이 허송세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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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양승태 대법원장(왼쪽 일곱째)이 18일 대법원 대법정에서 “상여금은 근속기간에 따라 지급액이 달라지지만 정기적·일률적으로 지급되는 통상임금에 해당한다”는 내용의 판결문을 읽고 있다. [오종택 기자]

방하남 고용노동부 장관은 18일 “(통상임금 판결과 관련) 기업이나 산업현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 현명하게 상생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 정부안을 조속히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정기적으로 지급되는 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한 뒤 첫 입장표명이다.

 이를 전해 들은 자동차부품 제조업체 F사의 임원은 “노사 간에 소송전까지 가는 갈등을 빚을 때는 상생을 위한 조치나 입법안은 고사하고 입장표명 한 번 제대로 없던 고용부”라며 “정부가 이번 사태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발끈했다. 이번 판결로 기업이 추가로 부담해야 할 수십조원에 달하는 임금폭탄이 고용부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고용부의 입장이 너무 궁금했는데, 결국 아무것도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경영계가 이처럼 고용부를 성토하는 것은 정부가 25년간 고수해온 지침 때문이다. 고용부는 1988년 ‘통상임금 산정지침’을 제정했다. 상여금은 매달 지급되는 것이 아니므로 통상임금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이게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로 뒤집힌 것이다.

 문제는 고용부가 행정지침이 잘못됐다는 점을 10여 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고칠 기회도 여러 차례 있었다. 97년 노사관계개혁위원회는 “임금체계 왜곡이 발생하고, 성과에 따른 상여금 지급을 해친다”며 시정을 요구했다. 2003년 노사관계선진화방안, 2007년 근로기준법제의 중장기 개선방안을 만들 때도 같은 지적을 받았다.

 그러나 고용부는 꿈쩍하지 않았다. 지난해 9월 28일 지침을 재고시할 때도 관련 규정을 바꾸지 않았다. 당시는 법원에서 ‘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해당한다’는 판례가 계속 쌓이고 있던 시점이다. 그러면서 최근 한 경제단체 모임에서 고용부 고위관계자는 “대법원 판결에선 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포함될 것”이라고 얘기했다. 자신들이 전국 기업에 적용하는 지침과 상반되는 해석을 갑자기 내놓은 것이다. H그룹 인사담당자는 “통상임금이 전국 기업의 핫 이슈로 떠오른 상황에서도 정부는 뒷짐을 지고 장막 뒤에 숨어서 혼란만 부채질한 꼴”이라고 성토했다. ‘고용부발(發) 대참사’라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일부 기업은 벌써부터 실력행사에 나설 태세다.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이나 구상금을 청구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지난달 서울시내 46개 버스회사가 서울시를 상대로 통상임금 추가 지급분 60억원을 돌려달라며 구상금 청구소송을 서울 서부지법에 냈다. 운송원가를 제대로 계산하지 않고 시 보조금이 지급됐다는 것이다. 한 중견기업(민주노총 금속노조 소속) 임원은 “대법원 판결이 났기 때문에 근로자에게 돈을 안 줄 방법이 없다”며 “임금을 지급한 뒤 정부를 상대로 적극적인 구상금 청구소송을 제기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경총도 정부를 상대로 기업이 소송을 제기하면 법률지원을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정부와 재계의 다툼과 별개로 내년 노사관계에도 암운이 드리워졌다. 기업은 부담을 줄이기 위해 임금을 깎거나 구조조정 또는 생산성 향상을 위한 각종 경영조치를 취할 전망이다. 노조는 이에 완강하게 저항할 것이 뻔하다. 전국의 사업장에서 상당한 진통이 뒤따를 전망이다.

글=김기찬 선임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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