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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쓰레기에 관한 명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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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유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

주말이면 어김없이 집 근처의 굴암산에 올라간다. 굴암산은 정상에 서면 남해 바다를 한눈에 볼 수 있어 부울경의 산꾼들에게 제법 알려져 있다. 이런 산이 동네에 있다는 것은 내게 크나큰 행운이다. 12월의 산행은 아직 낙엽길이 남아 있어 좋다. 낙엽을 밟으며 홀로 걷는 산행은 내 머리에 가득한 잡념을 지우는 명상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명상길은 오래가지 못하고 중간에 끊어지기 일쑤다. 휴지, 귤껍질, 페트병, 소주병, 비닐, 과자 봉지 등 수많은 오물들을 만날 때마다 잡념이 활개를 친다. 나의 명상을 방해하는 최고의 훼방꾼은 생수를 담았던 페트병이다. 부처가 깨달음을 방해하려는 마귀들에게 물병을 줘서 물리쳤다지만 내게 물병은 화를 일으키는 오물일 뿐이다. 쓰레기에 대한 분노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플라스틱을 소재로 만든 페트병은 수백 년이 지나도 썩지 않은 채로 아름다운 굴암산을 오염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한 해 미국에서만 200억 개가 넘는 페트병이 사용된다고 한다. 어림잡아도 수천억 개의 페트병들이 매년 지구에서 유통되고 있는 셈이다. 썩지 않는 일회용 포장재는 쓰면 쓸수록 역효과가 커진다. 수질과 대기 오염만큼 심각한 것이 플라스틱 공해라는데 이것의 주범이 페트병이다. 산속에서 버려지는 플라스틱 폐기물은 그야말로 약과다. 바다를 더럽히는 플라스틱 폐기물은 부메랑이 되어 인간을 공격한다. 데이비드 드 로스차일드는 이 공격을 막기 위해 나선 용감한 환경 전사다. 영국의 환경운동가인 그는 참으로 무모하다 싶은 모험을 감행했다. 페트병 1만2500개를 모아 ‘플라스티키’라는 배를 만들어 샌프란시스코에서 호주 시드니까지 129일 동안 항해했다. 그가 죽음을 무릅쓰고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모험을 한 이유는 단 하나. 인간이 바다에 버리는 플라스틱 폐기물의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텍사스 크리스천 대학의 제프 페럴 교수는 쓰레기를 통해 깨달음을 얻은 학자다. 그는 애리조나 대학의 종신 교수직을 박차고 나와 8개월간 외도를 했다. 남들은 종신 교수직을 버릴 정도라면 엄청난 학술작업을 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가 한 일은 쓰레기통을 뒤지는 일이었다. 8개월간 고향의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쓰레기를 수집했고, 재활용품으로 생활을 한 뒤에 『도시의 쓰레기 탐색자』라는 책을 썼다. 이 쓰레기 연구에서 그는 새로운 사실들을 발견한다. 그중 하나는 쓰레기 상당수가 쓰레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멀쩡한 물품들이 대다수였으며, 심지어 포장도 뜯지 않은 물건들이 즐비했다고 한다. 이렇게 쓰지 않은 쓰레기를 통해서 그는 소비지상주의 뒤에 자리 잡은 낭비문화를 보았다.

 그는 쓰레기통 속에서 찾은 편지, 졸업장, 가족사진, 결혼 앨범, 선물 등을 통해 소중한 삶의 흔적을 발견한다. 하루는 쓰레기 봉투에서 친구 어머니의 유품을 발견하고 등골이 오싹해진 적도 있다. 친구에게 바로 연락을 했지만 받고 싶지 않다는 싸늘한 대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과거와 기억이 담긴 물건들이 통째로 버려지는 것을 보면 쓰레기를 통해 개인의 삶도 복원이 가능할 것 같다. 버려진 인생의 조각을 맞춰서 개인의 역사까지 쓸 수 있다는 말이다. 이쯤 되면 쓰레기는 더 이상 쓰레기가 아니다. 제프 페럴은 쓰레기 속에 있던 잡지와 책, 주요 고서들을 찾아내 공부까지 했다. 그는 이것을 ‘길거리의 깨달음’이라 했다. 나는 버려진 쓰레기를 명상을 방해하는 오물로 생각했지만 제프 페럴은 명상과 깨달음의 존재로서 그 가치를 끌어올린 것이다.

 한때 부산 동삼동 쓰레기장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그곳은 수천 년 전 신석기인들이 버린 생활 폐기물이 층층이 쌓여 형성된 패총 유적이었다. 이 신석기 쓰레기장에서는 조개껍데기, 물고기와 동물뼈, 토기와 석기 등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선사시대의 역사 연구를 한층 심화시킬 수 있었다. 실제로 고고학자들은 난지도 쓰레기장에서 발굴 연습을 하기도 했다. 쓰레기는 무심코 버려졌을 때 붙여진 이름이다. 비록 쓰레기라도 거둬서 연구하면 역사 자료가 되고 살펴보면 깨달음의 대상도 될 수 있지 않을까.

유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