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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3)<제31화>박헌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얘기에 앞서>
남로당의 두령이었고 전북한부수상을 지낸 박헌영이 비명에 죽은지도 벌써 17년이 되었다. 1955년12월15일, 평안북도 철산군의 여우골에서 끝내는 자기네 동지들의 손에 목숨이 끊기기까지, 박헌영은 누구보다도 광신적인 공산주의자로서 널리 알려져왔다.
그는 거의 반세기동안 과격한 공산주의방식의 활동을 통해 파괴 파업 폭동 살상등, 시종 이땅에 이루헤아릴 수 없는 회오리를 몰고간 장본인이기도했다. 그런 그가 말년에는 숙청이란 너울을쓰고 처형되어 파란많은 생애를 마쳤다.
한때 나는 박헌영을 추종하고 그의 정치노선을 열렬히 지지했던 사람중의 하나였다.
비록 나이는 차이가졌지만 박헌영 못지않게 학생시절부터 사상운동에 가담했다고 자부하고싶다. 그런경력의 내가 『남기고싶은 이야기』를 통해 「내가아는 박헌영」을 얘기해보려고 하는것은 새삼스러이 공산주의자인 그의 전기적생애를 되살펴보려는 의도가 아니다.
그보다 하나의 인간이 평생을 몸바친 공산주의 체제의 정치속에서 어떻게 파멸되어갔으며, 그가 얻은 인생의 소득이 무엇이었나를 세상에 밝혀두고 싶기때문에 이글을 쓰는 것이다.
나는 l951년5월 북한에서 박헌영의 초조한듯한 마지막 모습을 본일이있다. 지금도 그의 모습이 눈에선하다. 그가 마지막 사형대데 올라섰을때 순간 하나의 인간으로서 무엇을 생각했었을까. 만일 형의 집행자가 총뿌리를 거두고 『마지막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면 그는 뭐라고 대답했었을까. 박헌영의 인생을 생각할때마다 그런 상상을 해본다.
천행으로 「자유의품」에 안긴이래 나는 공산주의란 인간의 사고로 창조할수있는것가운데 가장 비정한 정치체제라는것을 뼈저리게 느껴왔다. 박헌영의 죽음을 통해볼때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일찌기 소위 사상운동에 눈뜨고 박헌영의 이름을 듣게된것은 내친형의 영향과 그리고 아주 우연한 사건 때문에 비롯됐다.
내가 진주보통학교(지금 국민학교) 6년때였다. 나의 형박기동은 서울진성고보에 다닐때부터 독립운동에 참가하고있었다. 나는 그때 너무 어려서 형이 무슨 사건에 관련됐는지 잘 모르나 형은 광주학생사건을 전후해서 세번이나 체포되어 구속됐었다. 집에서는 논·밭을 팔아 겨우 형보석으로 석방해놓았으나 형은 어느날 밤 집을 뛰쳐나가 중국으로 망명했다.
나는 그때 형이 나라의 독립을위해 싸우고있다는것을 알고 나도 커서 형과같이 되리라 결심했다.
형의 망명이 알려지자 일제 경기도경찰부의 형사대가 진주의 우리집에까지 찾아와서 나를 경찰에 연행, 형이 누구와 연락했고 어떻게 탈출해 갔는가를 심문하기 시작했다. 나는사실 형이 망명한다고 집을나갈때 형의 친구로부터 전달받은 검은 「가톨릭」승복을 챙겨주었던 것이다. 일본경찰은 어린나에게 사정없이 고문을 가했다.
각목에 맞아 손가락이 무러지고 왼팔이 골절되는 심한 고문을 당했다. 그러면서도 형이 신부처럼 변장해서 압록강을 무사히 건너는 광경을 그려보며 이를 악물고 참았다. 국민학교6년의 어린이의 마음속엔 강렬한 저항심리가 싹텄다.
지금 생각해봐도 내 망망한 인생의 시작은 그때 일경으로부터 당한 고문사건으로 말미암아 큰 전기를 맞았던것 같다. 그때문에 나는 너무 일찍이 「독립운동과 정치」에 눈뜨게 되어 험난한 길을 걸었다.
보통학교를 나온 나는 서울중앙고보(교장 현상윤)에 진학했다. 4학년때 나는 정말 나자신도 모르는 우연한 돌발사건에 휩싸여 종로경찰서에 붙잡혀가 또한번 죽도록 고문을 당했다. 그해 봄 마침내 하숙집엔 제일고보·배재고보에 다니는 친구 5, 6명이 놀러왔었다. 우리는 술을 마시고 유쾌하게 놀다 어두워서야 헤어졌는데 우리집밖을 나선 친구들이 우연히 일본순사 한사람과만나 시비끝에 그만 일경을 두들겨 패주고 말았다.
내가 뒤따라 나가 봤을때는 이미 사건은 엎질러진 물이되었고 순사와싸운 친구는 재동파출소에 끌려가 있었다. 우리는 그때 뿔뿔이 달아났으면 희생자는 한사람으로 그치고 말았을텐데 그시절만해도 의협심을 중히여기는 때이어서 모두가 공범으로 자진해서 걸어들어가 입건되고 말았다.
그중에서도 나는 친형이 종로서에 세번이나 잡혀간 경력이있고 망명중이라해서 불수학생으로 몰려 가장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이사건을 안 학교에서는 현상윤교장이 친히 찾아와 경찰에 사과하였다. 현교장은 나에게 시말서만 쓰면 우선 정학처분을하고 곧 복교시켜주겠다고 달랬으나 나는 현교장의 호의를 거절했다. 그날 나한테 놀러왔다가 퇴학당한 친구들가운데는 제일고보생이었던 허학구(현정화금속사장)도 끼여있어 지금도 허군을보면 미안한 생각을 금치못한다.
아뭏든 중학을 졸업할 무렵에 퇴학당한 나는 갈곳이 없었다. 그때 내나이 16세때였다.
나는 형이 망명해있을 중국에 가려고도 마음먹었으나 어머니가 주는 70여원을갖고 현해탄을 건넜다.
내가 여기서 장황하게 내소년시절의 얘기를 늘어놓은 것은 일제하의 한국의 젊은이면 누구나 겪은 시대적배경을 잠시 설명해야 하겠기 때문이다.
당시의 젊은이는 누구나 우리나라의 주권을 말살한 일제의 억압정치에 저항하지 않곤 배겨낼수없었다. 아마 박헌영의 인생도 그험난한 출발점을 무엇인가 일제에 저항해보고싶고 젊은울분을 발산해보고싶은 충동에서 시작했을는지 모른다. <계속>
◆저자소개
박갑동씨는 1919년 경남산제군 단계서 출생. 일제때인 중앙고보재학시절 종로경찰서원 구타사건에 관련, 퇴학당한뒤 일본조도전대학 정치학과에 입학, 1941년 동교를 졸업했다.
해방후에는 남노당에입당, 중앙선전부·기관지부(해방일보의 정치부기자)·이논진「블록」통제지전부빈등으로 박헌영을 추종하며 좌익운동을 하다가 월북했다. 북한에서는 문화선전생구나파부장을 지냈으나 박헌영숙청후 북한울 탈출, 지금은 「자유의품」에 안겨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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